인터뷰
‘생명 나눔’ 솔선하는 연극배우 윤석화
청아한 목소리로 친근한 멜로디의 광고 노래를 부른 CM송 가수,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화려한 수식어가 따르는 윤석화도 상처를 입고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데뷔 40년을 넘긴 연극배우 윤석화를 만났다.
지난 6월 13일이다. 윤석화는 ‘윤석화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일곱 번째 이야기 :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소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설치극장 정미소’의 160석을 관객들이 가득 메웠다.
6일 동안 열린 올해 자선 공연에는 연극계의 큰언니 박정자를 비롯해 윤씨가 아끼는 후배인 뮤지컬 배우 최정원·전수경·박상원·송일국·이종혁·배해선·박건형·카이·윤공주·김현수 등이 초대 손님으로 나와 ‘생명 나눔’ 뜻에 동참했다. 이들은 “무엇이든 꾸준히 오래 지속한다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지만 나눌수록 행복하다”는 윤씨를 응원하기 위해 기꺼이 게스트로 참여하고 바자회 경매 행사도 진행했다. 이렇게 얻은 수익금 전액은 동방사회복지회와 애란원에 기부했다.
CM송 부르다 우연찮게 연극 데뷔
윤씨는 1남 6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작고 깡마른 체구였던 그는 노래 잘 부르고 명랑 쾌활한 성격이었다. 언니들과 함께 놀던 유년 시절, 그의 집 꽃밭에는 장미·월계·채송화·양귀비·맨드라미·나무딸기·감나무·밤나무·등나무·포도나무·라일락·목련 등 철마다 온갖 나무와 꽃이 형형색색으로 피어났다고 한다. 그 꽃밭을 보고 자라며 꾸었던 최초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사춘기가 되자 친구들은 ‘가수가 되라’ ‘선생님이 되라’ ‘소설가가 되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그래도 꿈은 한결같이 ‘현모양처’였다. 왜? “울 엄마처럼 형형색색의 꽃들 같은 아이를 낳아 행복한 엄마가 되고 싶었지요.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로 연극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연극배우가 됐습니다.”
학생 때 합창반 활동을 한 윤씨는 고교 졸업 후 한 조미료 회사의 로고송을 부른것이 계기가 돼 이후 각종 CM송(광고방송용 노래)을 섭렵했다. 대한민국 최고 인기 CM송 1위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윤씨다. 그렇게 광고회사를 드나들다가 사무실 옆에 있던 민중극단에 놀러 갔고, 거기서 연출가 정진수 씨를 만나 연극 ‘꿀맛’에 첫 등장했다. 그때가 1975년, 그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윤씨는 이후 ‘신의 아그네스’ ‘덕혜옹주’ ‘딸에게 보내는 편지’ 와 뮤지컬 ‘명성황후’ ‘아가씨와 건달들’ ‘사의찬미’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국내 대표적인 연극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미혼모 자립 위해 자선 콘서트 꾸준히 열어
연극배우로 20년이 되던 1994년 5월 16일, 윤씨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었다. 자연스레 2세에 대한 소망을 지녔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시들어버린 붉은 꽃을 버리며, 가슴에는 차마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던 강물들이 흘러넘쳐 텅 빈 방에서 혼자 울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도 세상 모든 여자들처럼 생명을 주세요, 제발….”
윤씨는 오랜 기다림 끝에 2003년과 2007년 각각 가슴으로 낳은 아들과 딸을 품에 안았다. 그러면서 한 생명을 보듬는다는 건 여성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감사함을 나누고 싶어 입양기관과 미혼모 자립을 돕기 위한 자선 콘서트를 기획했다.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고, 가능한 한 외국에 입양 보내지 않고 국내에서 키우는 문화가 정착됐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다. 그는 미혼모를 살리면 두 생명을 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늘 생각한다.
2003년 ‘엄마의 자장가’를 주제로 첫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 이를 시작으로 ‘작은평화’ ‘어메이징 그레이스’ ‘엄마로 살아보니~’까지 네 번의 자선콘서트를 연 데 이어 영국 런던에서 일할 때는 현실에 맞춰 작은 음악회를 열어 명맥을 이었다. 그는 2015년 여섯 번째로 ‘사랑을 속삭이다’를 공연하면서 2년에 한 번씩 하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갈비뼈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고도 올해 몸이 회복되자마자 가장 먼저 할 공식 공연 일정으로 일곱 번째 자선 콘서트 ‘만남’을 기획하고 실행한 것이다.
이번 공연의 스토리는 ‘하늘’ ‘꿈’ ‘상처’ ‘벌판’ ‘인연’ ‘길’로 이어지다가 결국 나무의 뿌리와 바다 같은 자유로 막을 내린다. 제목이 콘서트이기는 하지만 드라마 기법을 섞었다. 제작비는 본인이 전부 부담하고 수익금은 매번 주최한 복지재단에 전액 기부한다. 올해 수익금은 3000만 원 정도다. 윤씨는 그렇게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힘이 생긴다고. 그럴수록 이름 없는 미혼모에게 용기를 주고 같이 살아가는 삶에 감사를 느낀다고 말한다.
“오페라가 없어도 내일의 태양은 떠오르겠죠”
윤씨는 공연 무대뿐 아니라 텔레비전에도 등장해 특별한 모습으로 팬들과 만났다.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중종의 첫 부인이자 사임당의 조력자 격인 단경왕후를 연기했다. 또 MBC 예능 프로그램인 ‘일밤-복면가왕’에 로마의 휴일 오드리 헵번으로 출연해 반전 매력을 뽐내기도 했다.
그에게 그동안 출연한 작품 가운데 생각나는 대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다 잊어버려요, 그래야 다음 것을 소화할 수 있잖아요”라고 응답한다. 다시 웃으면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부지런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덕혜옹주’ 얘기도 나온다. “더러움은 더러울 뿐이고 그저 흘러갑니다. 견딘다는 것, 참아야 한다는 것, 맞서다 보면 다 똑같아지는 것이겠지요.”
윤씨는 지난해 연극 데뷔 40주년 기념공연으로 연극 ‘마스터클래스(연출 임영웅)’ 무대에 올랐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가 은퇴 뒤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실제로 진행한 마스터클래스 강의를 토대로 미국 극작가 테렌스 맥날리가 극화한 작품이다. ‘40년 기념비’로 준비한 연극 작품을 통해 그는 마리아 칼라스의 대사에서 예술의 존재 가치와 예술가로서의 용기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한다.
잠시 대사 한 토막을 떠올린다. “오페라가 없어도 내일의 태양은 떠오르겠죠. 세상은 우리 없이도 돌아갈 거예요. 하지만 우린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없는 세상에 비해 훨씬 풍요롭고 현명한 세상으로 말입니다. 예술은 어렵지만 ‘저게 뭐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생각은 자기 것
이 됩니다….”
환갑 때 아들딸 ‘어메이징 그레이스’ 연주
그는 어느덧 예순 살이 넘었다. 그에게 나이란 무엇일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 웃는다. 아주 쿨하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기쁘고 대견스럽고 담대하다는 말로 대신한다. 한 나무를 보면 그 뿌리를 생각한다. 누구라도 해야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무가 나무답게 산다는 것을 얘기한다.
그는 지난해 연극 데뷔 40주년과 환갑을 기념해 평소 자신의 등을 토닥여주는 인사 50명을 초청해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소감을 물었다.
“연극배우 40년 세월이 별것 아니죠? 그래도 본분과 원칙을 지키면서 최선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임에 아들과 딸이 악기를 들고 참석했다. 아들은 클라리넷과 피아노, 딸은 첼로를 연주했다. 곡목은 ‘어메이징 그레이스’. 아이들은 음악·운동·외국어 실력을 잘 쌓았다. 모르긴 해도 윤씨는 그날 무척 아름다웠고,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대놓고 말은 안 했겠지만 내심 기대를 했을 테니까.
그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너의 친구란다”라고만 얘기한다. 영국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특출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문화적이든 스포츠든 인정받는 학생으로 성장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삶을 보거라. 진실로 간결하여, 오히려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는 기쁨의 삶! 나무의 삶! 해마다 비워내고 다시 시작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나무가 나무답게 사는 것처럼….”
그가 아들과 딸한테 들려주는 말이다. 나누기를 희망하는 삶을 살다가 지칠 때는 언제나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주는 나무를 생각하라고, 나무처럼 의연하고 당당하게 커가라고 당부한단다. 아무리 많이 모여 숲을 이루어도 다투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나무처럼 어떤 비교에도 의연하라고 했다. 윤씨는 다행히도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올해 어떤 계획이 있을까. 우선 자선 콘서트를 순회 공연할 예정이다. 감사하게도 와달라는 곳이 여러군데 있다. 그래서 서울에 한정하지 않고 지방 나들이도 하면서 ‘생명 나눔’의 의미를 확산할 작정이다. 오는 11월에는 연극 한 편을 상연하고, 내년 3월께 박정자·손숙·윤석화 세 사람이 출연하는 연극 공연도 계획돼 있다.
윤씨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다시 아들딸 얘기를 꺼냈다. 운동도 잘하고 음악도 좋아하고 걱정 없이 자라줬다고 했다. 5월의 푸른 나무처럼 엄마 곁에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내내 아이들 자랑만 했네요”라며 웃어 보인다. 연극배우, 뮤지컬 연출가, 공연 제작자, 돌꽃컴퍼니 대표 등 화려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식 자랑하는 평범한 팔불출 엄마였다.
글 김문·인터뷰 작가 | 사진 고승범·사진가 | 자료제공 전원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