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문단 데뷔 반세기, ‘숙맥(菽麥)’으로 살아가는 시인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은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맑고 향기로운 친구와의 인연을 지란지교(芝蘭之交)로 노래한 유안진 시인(76)을 만났다.
유안진 시인은 지난해 ‘숙맥노트’라는 시집을 냈다. 17번째 시집이다. 그는 여기에서 구시렁구시렁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등단 50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구름의 딸이었고 바람의 연인이어라’이었고, 어쭙잖은 헌혈 몇 방울 ‘봄비 한 주머니’였고, 10원짜리 동전 ‘다보탑을 줍다’에 불과했고, 감쪽같은 거짓말로 참말하며 ‘거짓말로 참말하기’, 민속해학 ‘알고(考)’에 흘렸고, 지향-현실의 모순 ‘둥근 세모꼴’이었고, 때 얼룩 뭉치 검정 모성의 색 ‘걸어서 에덴까지’를 거쳐와, 이제는 녹두-보리 구별 못 하는 ‘숙맥(菽麥)’이라, 제 눈에 안경이라서 숙맥 짓만 보이는지….”
30년 넘게 사랑받는 ‘지란지교를 꿈꾸며’
유 시인은 100년 한국 시사(詩史)의 절반 동안 농부의 호미가 녹슬 겨를 없이 지난하게 시 고랑을 일구며 오늘날 시단의 중추로 우뚝 섰다. 1965년 ‘달’, 1966년 ‘별’, 1967년 ‘위로’ 등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현대문학’에서 시 3편을 박목월 선생에게 3회 연속 추천받아 등단함으로써 시작부터 주목을 끌었다. 이후 1970년 ‘달하’라는 시집을 처음 펴내면서 특유의 섬세한 감성문체로 많은 팬을 확보해나간다. 시인으로 대중 스타가 된 것은 1984년 ‘문학사상사’에서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산문을 발표하면서였다. 사실 말이 발표이지 “내일까지 원고를 써달라”는 문학사상사의 다급한 청탁에 작성한 ‘땜빵 원고’였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자 출판사에서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제목으로 수필집을 펴내면서 단박에 스타작가가 됐다. 이후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유 시인의 대표작이 됐다.
초여름 햇살이 호랑나비 날개를 들썩이던 6월 초,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인왕산 입구 수성동계곡 정자에서 유 시인과 마주 앉았다. 때마침 살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와~, 여기 좋네요. 푸르고 시원하고!”
유 시인은 그렇게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인왕산 꼭대기 바위와 푸른옷으로 단장한 주위 소나무들을 바라봤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인근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창 너머에는 벚나무들이 짙은 초록 옷으로 갈아입고선 여름 바람에 나풀나풀 춤을 춘다.
“선생님은 여름을 좋아하십니까?”
“여름은 덥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주는 의미가 있어요.”
유 시인은 40대에 더운 여름을 배경으로 ‘여름’ ‘여름지옥’ 등 여러 편의 시를 썼다. 살짝 감상해본다.
‘…대낮에도 한 차례씩 / 소나기는 흐느끼더니만 / 암소뿔도 물러빠진다는 / 칠팔월 무더위는 / 어쩌자고 나꺼정 불이 붙었노…’ (여름)
‘나보다 절박하다고 매미들 떼로 운다 / 울음에 걸린 나무들이 꼼짝달싹 못하고 / 나뭇잎들 죽은 듯 숨도 못 쉰다…’ (여름지옥)
유 시인이 그간 발표한 시의 제목을 보면 ‘꿈꾸는 손금’ ‘기쁜 이별’ ‘봄비 한 주머니’ ‘다보탑을 줍다’ ‘거짓말로 참말하기’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등 철학적인, 선(禪) 같은 느낌을 준다. 제목을 직접지었는지 물었더니 “물론!”이라는 대답이 지체 없이 돌아온다.
숙맥처럼, 바보처럼 사는 삶 좋아
화제를 ‘지란지교를 꿈꾸며’로 돌렸다.
“그동안 몇 부나 팔렸습니까?”
“몰라요. 여기저기 출판사를 거치면서 지금도 찍어내고 있으니 알 수가 있나요.”
“그렇다면 얼마 정도 벌었습니까?”
“집 사고 차 샀어요(웃음).”
글이란 어쩌면 어떤 결핍에서 나올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정에 대한 갈망은 있으나 그걸 진실로 채울 수 있는 일이란 쉽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지란지교를 꿈꾸며’ 같은 내용을 소망하는지도 모르겠다. 유 시인은 그런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냈기에 30년 넘게 사랑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집 중에서는 ‘세한도 가는 길’(1998), ‘다보탑을 줍다’ (2004) 등이 가장 많이 팔렸다.
“시를 쓸 때에는 누구한테 미리 읽어주나요?”
“물론이죠. ‘묵사발’이라는 시 모임이 있는데 거기에서 각자 쓴 시를 일독할 때 내놓지요.”
그는 경북 안동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웠다. 종이가 귀해 앉은뱅이 책상 크기만 한 나무상자에 모래를 가득 채우고 물을 뿌려 굳힌 뒤 그 위에 천자문을 쓰곤 했다. 떡갈나무 잎을 댓돌로 눌러 종이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집안이 대전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는 대전여중에 입학했다. 이 무렵 헌책방에서 정비석 소설을 읽었고 김소월의 시를 읽었다. 중2 때였다. 특활반에서 담당 선생님이 김소월의 ‘산유화’를 얘기했다. ‘꽃이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라는 대목에서 그는 “선생님, 봄-여름-가을이 순서인데 왜 가을(갈)이 먼저 나오나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그거야 소월의 마음이지”라고 설명했다. 순간 학생들이 마구 웃었고, 그는 창피함으로 어쩔 줄 몰랐다. 속으로 ‘두고 봐라, 내가 반드시 시인이 되어 선생님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다짐했단다. 이후 열심히 시를 지었고, 중3 때 교지에 ‘바다’라는 시가 실렸다.
호수돈여고를 거친 유 시인은 교육자가 되기 위해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시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헌책방에서 박목월 시집을 사서 읽었고, 나중에 목월 선생을 어렵게 만나서 “자네는 숙맥이니까 글을 좀 쓰겠다”는 말을 들으며 엄정한 3회 추천을 받아 시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면서도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대학 교수로 강단에 섰다. 특히 미국 유학 시절 우리 민속의 가치에 눈을 떠 30여 년간 한국 전통사회의 아동과 여성 민속을 연구해 다수의 이론서를 펴내기도 했다.
서울 방배동에서 37년째 살고 있는 그는 얼마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혼자 지내며 아이같은, 숙맥 같은 시를 쓰고 있다. 또 삶과 시문학을 주제로 강연을 다니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글 김문・인터뷰 작가 사진 고승범・사진가 (자료제공 전원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