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행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오느냐

1457년 6월 22일 돈화문을 출발한 단종의 유배행렬은 천리길을 걸어 꼬박 일주일 후인 6월 28일 마침내 청령포에 이르렀다. 이곳은 송림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서쪽은 육육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삼면이 깊은 강물에 둘러싸여 한눈에 보기에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절해고도(絶海孤島)와도 같은 곳이었다.
		

강원도 영월은 길마다 사람의 사연이 배어 있다. 그 사연은 그대로 역사의 한 구비이기도 하다. 단종 유배길과 김삿갓 유허지가 대표적인 곳이다. 영월군은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솔치재 입구에서 청령포에 이르는 43km 구간을 ‘단종대왕 유배길’로 조성했다. 이 길은 꼭 ‘단종애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고개를 넘고 강물을 따라 걸으며 강원도의 수려한 자연과 소박한 인심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길은 다시 강물을 따라 김삿갓 유허지로 이어진다. 거기 평생을 해학과 풍자의 삶을 살다 간 방랑시인이 청산 속에 아늑히 잠들어 있으니. 
		

고운 임 여의옵고

1457년 6월 22일, 단종(1441~1457)은 살곶이다리를 건너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머나먼 유배길에 오른다. 남한강 물길을 거슬러 배가 닿은 곳은 이포나루. 여주의 어수정에서 잠시 목을 축인 단종은 여기서부터 뭍길로 영월 땅을 향한다. 원주 싸리치를 거쳐 영월 청령포에 이르는 길은 고개마다 단종의 피눈물이 스민다. 노산군으로 강등당한 단종이 올랐다 하여 군등치(君登峙), 슬픔으로 서산에 지는 해를 향해 절을 한 배일치(拜日峙)며, 마침내 참았던 눈물처럼 소나기가 흩뿌리는 소나기재를 넘는다.

소나기재 마루에서 바위가 갈라진 선돌 사이로 바라보는 서강 물은 참으로 무심하다. 그 물은 청령포의 발치를 적신 후 이내 동강 물과 만나 남한강이 되어 흐른다. 남한강 물은 다시 북한강 물과 만나 한강이 되어 한양으로 흐르고. 하지만 시간은 물길처럼 되돌릴 길이 없어 끝내 유배의 포구에 다다르고야 만다.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이고, 남은 한 면마저 험한 절벽으로 막힌 청령포는 오롯이 유배를 위해 태어난 땅이다. 나어린 단종은 이곳에서 한때를 보내며 그 소명을 완성한다. 해질 무렵이면 서쪽 낭떠러지에 올라 아득한 한양 땅을 그리워했다는 것이니, 이른바 ‘노산대’다. 솔숲 사이에 우뚝한 ‘관음송(觀音松)’은 또 어떤가. 이 땅에서 가장 키가 크다는 이 소나무는 단종의 슬픈 사연을 보고 들었으니 관음송이다.
그러나 단종은 청령포에서마저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해 여름 홍수가 나자 읍내 동헌인 관풍헌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로 했으나 금성대군에 의한 복위사건으로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으며, 끊임없이 자살을 강요당하다 그해 10월 24일, 마침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야 만다. 그때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세조의 명을 받아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가지고 왔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어명을 받들어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물가에 앉아 긴 울음을 운다.
‘단종대왕 유배길’은 청령포에서 끝이 나지만, 단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은 아무래도 장릉이 종착지가 된다. 후환을 두려워한 탓에 거두는 이 없이 버려져 있던 단종의 주검은 한밤중 영월 호장 엄홍도에 의해 몰래 옮겨져 산기슭에 묻혔다.
그 무덤이 바로 장릉이다. 산줄기 높은 곳에 자리한 능은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채 한양을 향하고 있는데, 그를 둘러싼 소나무들이 묘를 향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져 있어 더욱 애틋하기만 하다.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평생을 삿갓으로 해를 가리고 죽장에 의지한 채 방랑을 일삼던 김삿갓(1807~1863)은 쉰일곱의 나이에 전라도 화순 동복에서 숨을 거둔다. 그런 아버지 뒤를 좇아 역시 방방곡곡을 떠돌던 그의 아들 익균은 어렵사리 화순에 묻힌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그가 방랑 전까지 살았던 영월땅 어느 기슭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그의 노래는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었지만, 그의 무덤은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진 채 끝내 종적을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그의 무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의 평생에 걸친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김삿갓의 무덤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양백지간, 영월과 영춘 어간에 있다’는 고문서 기록 하나에 의지해 마침내 영월 와석골 노루목에서 사라진 무덤을 찾아낸 것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 호는 난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고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향시에 나가 급제까지 하였으나, 평생을 ‘죽장망혜(竹杖芒鞋)’ 방랑의 삶으로 떠돌아야만 했다. 그가 그리 된 것은 향시 때 자신이 쓴 글 때문이었다. 향시의 시제는 ‘홍경래의 난 때 농민군에 붙잡혀 목숨을 구걸한 선천 부사 김익순의 죄를 탄하라’는 것이었고, 그는 거침없이 ‘한 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써내려가 그 글로 장원에 급제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김익순은 바로 자신의 친할아버지였다. 집안에서 그 사실을 숨기는 바람에 자신만 까마득하게 몰랐던 것이다.
부지불식간 자신의 선조를 욕보인 그는 그 죄를 씻을 길이 없다 하여 입신양명은 커녕 집도 처자도 버리고 머나먼 방랑길에 올랐다. 하지만 타고난 글재주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가는 곳마다 시문을 지으면서 숱한 예화를 남겼다. 그의 글은 마치 자신의 아이러니한 신세를 한탄이라도 하듯 골계와 해학으로 넘치고, 때론 양반 세도가의 허위의식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통렬함을 보이기도 한다. 

이 땅에 남아 있는 김삿갓의 자취는 그의 일생만큼이나 허망하다. 그의 출생지로 알려진 양주 회암리의 폐사지가 그렇고, 그가 생을 마감했다는 화순의 초분지도 그 자리만이 남아 있을 뿐 초분은 바람결에 흩어진 지 오래다.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평생이 온통 방랑이었으니 어디서 났으며, 어디에 머물렀으며, 어디로 가는지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와석리 노루목에 이르는 그의 유허를 찾아가는 길은 4km의 긴 계곡으로 이어지는데, 그 길에 청산은 속절없이 푸른 물을 흘려보낸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http://all100plan.com/2018-summer-pi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