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행

언덕 밑 정동 길엔 – 시월 정동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 이영훈 작사·작곡, 이문세 노래 〈광화문 연가〉중에서

아무리 코로나가 극성을 떨어도 가을은 오고 또 깊어가리라.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속에 마음과 표정을 가둬버린 엄혹한 시절이지만 어찌 추억마저 잃어버릴까. 시월, 덕수궁 돌담길의 추억을. 예년 같으면 ‘시월 정동’ 축제로 북적였을 정동 길을 이제 고즈넉이 추억으로라도 걸어보리라.
기실 정동길엔 더 오랜 시간의 기억이 담겨 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정동의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정동’이란 이름부터가 조선 개국 후 최초로 조성된 왕릉인 정릉이 애초 위치한 데서 비롯하지만 조선이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이 태어나는 어간에서 정동은 저물어가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를테면 조선의 시작과 끝이 담긴 길이랄까. 굳이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도 좋다. 정동 길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고 그 잎들 흩날리면 우리들의 추억도 시나브로 깊어만 간다. 

왕조가 저물고 근대가 탄생하는 그때 그 정동 길

프란치스코교육회관의 성 프란치스코 상. ‘가난한 성자’는 넉넉한 가을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구 러시아공사관 탑부. 사적 제253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구한말 역사의 한 장면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정동 길 산책은 경향신문사 쪽 입구에서 시작한다. 경향신문사를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이 프란치스코교육회관이다. 1988년 개원한 프란치스코교육회관은 1923년 무렵 경성외국인학교가 이전한 곳이기도 하다. 가톨릭 신자들의 피정과 각종 모임을 위한 도심 속의 영성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다음으로 캐나다대사관 옆 골목을 오르면 언덕바지에 자리한 옛 러시아 공사관을 만난다. 조·러통상조약 체결에 따라 1890년 이곳에 들어선 러시아공사관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급히 피신하였던 이른바 ‘아관파천(1896)’의 현장이다. 현재는 3층 탑부만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덕수궁으로 이어지는 길은 ‘고종의 길’로 명명되었다.
이번에는 중명전이다. 덕수궁 외곽에 위치한 중명전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고종의 집무실이자 외국사절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에는 황태자(순종)와 윤비의 가례(嘉禮)가 거행된 역사적 장소다. 1925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복원을 거쳐 전시관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가까이 정동극장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의 명맥을 잇고 있는 곳으로, 전통 상설공연과 창작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 교회당인 정동교회는 건물 자체의 건축적 의미도 있지만 미국공사관, 이화여고, 배재학당과 인접했던 곳으로 미국문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는 중심지였다는 건축 외적 의미도 간직하고 있다. 개신교가 우리 땅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84년으로, 천주교보다 150년이 늦은 뒤였다. 1885년 선교를 위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인 아펜젤러 목사는 활동무대를 정동으로 정하고, 1897년 배재학당의 설립과 함께 정동교회를 세웠다. 정동교회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빅토리아식 예배당으로, 붉은 벽돌을 사용한 비교적 간결하고 중후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남쪽 모퉁이에 솟은 사각의 종탑은 첨탑이 아닌 평탑으로 이 건물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정동교회가 특히 사랑스러운 것은 노래 <광화문 연가> 때문이다.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눈 덮인 조그만 예배당’의 모델이 바로 정동교회다. 정동교회 맞은편에는 <광화문 연가>를 작사·작곡한 이영훈의 노래비가 서 있다. 2008년 타계한 그를 기리기 위해 가수 이문세를 비롯한 지인들이 2009년 세운 기념비다.

중명전은 덕수궁 내에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나 지금은 덕수궁 밖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공사관을 설계하기도 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작품이다.

돌담길 켜켜이 깔린 시월의 추억

가을 정동길엔 커피향이 그윽하다. ‘마음을 내려드린다’는 한 카페의 간판 문구가 향그럽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 잠시 들렀다가 이내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다. 시월을 걷는다. 이 사붓한 돌담길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깔려 있는 것일까. 높다란 담장 위로 담장보다 더 키 큰 나무들이 푸르름을 다하고, 서서히 붉고 노란 빛으로 갈아입는다. 어느덧 그 빛마저 지고 나면 저 담장 위로, ‘조그만 교회당’ 위로 눈은 내려 덮이리라. 그렇게 세월이 간다 한들 우리의 추억마저 덮이고 사라질까. 아니 그런다한들, 그럴 때까지라도 걷고 또 걸으리라. 마지막 빛 한 줌조차 다 사라져 이윽히 어둠으로 덮일 때까지. ‘시월의 마지막 밤’까지. 

유성문 여행작가

http://all100plan.com/2020-autumn-pi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