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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살던 다정하고 애틋한 동네는 – 영화 <남매의 여름밤>이 그린 집과 가족

윤단비 감독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보면서 집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가족이 사는 동네에 자꾸자꾸 눈길이 갔습니다. 지하방에 사는 가족을 그린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할머니의 시신을 집안에 묻어두고서라도 그 집에 계속 살려고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과도 견주어 보게 됩니다.

<남매의 여름밤> 속 가족들은 가난하고 보잘것없기로는 <기생충>이나 <어느 가족>에 뒤지지 않습니다. 악몽 같은 가난에 갇힌 답이 없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남매의 가족에 대해서는 자꾸 비져나오는 눈물을 참으면서라도 다정한 눈길로 그들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이 아끼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그들이 사는 공간의 오래된 숨결이 그들에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파트 서울’을 떠나

영화는 아빠(양흥주)가 남매의 손을 잡고 이사를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세 식구 살림은 봉고차 한 대에 실릴만큼 빈한하고 그들이 살던 곳은 어느 빌라 지하방이지만, 누나 옥주(최정운)는 쉽게 발을 떼지 못합니다. 이곳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공간이 아니라 그들 가족이 깃들어 살던 정든 곳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또 소녀는 그들이 이곳을 벗어나면 어디로 갈 수 있을지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금세 드러납니다.
그들은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가 시작된 동네를 떠나 할아버지 양영묵(김상동)이 사는 오래된 2층 양옥집에 얹혀살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공간이동처럼 보입니다. 재개발은 공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지우는 방식입니다. 반면 1970년대 선풍기, 80년대쯤 샀을 것 같은 대형 전축 같은 수십년 묵은 살림들이 켜켜이 쌓인 할아버지의 집은 기우뚱한 대문과 중문마저도 이 집에서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온 아빠, 마침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온 고모(박현영) 등 다시 모인 가족들은 콩국수를 말고, 수박을 쪼개고, 할아버지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면서 이 집에 또 한 겹의 기억을 쌓아올립니다.
영화에서 가족들은 정말 맛있게 밥을 먹습니다. ‘가족’이란 말이 일본에서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원래 ‘식구’라는 말을 썼는데 그들은 식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그 집의 수십년 묵은 살림처럼 말없이 시간을 보내며 이곳을 지키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또 이곳이 서울이었다면 할아버지가 이처럼 오래토록 집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상상을 해봅니다. 카메라는 감정을, 사건을, 공간을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아주 정직하게 담습니다. 영화 마지막 크레딧에 나온 촬영장소를 보면 세 식구가 살던 지하방은 실제 수색 뉴타운 재개발이 시작된 서울의 한 동네고, 가족이 옮겨간 곳은 인천의 한 산동네입니다. 감독이 한 신문과 인터뷰한 내용대로라면 할아버지의 양옥집도 실제로 노부부가 50년 동안 살면서 아이들을 키웠던 집에서 찍었다고 합니다.

함께 하는 거실, 자기만의 방

사춘기 소녀 옥주는 어떻게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은 마음과 할아버지와 고모까지 합세한 가족 울타리를 사랑하게 된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자신만의 공간이란 고독한 성을 쌓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에 능동적으로 닿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배워나가는 시간입니다.
한국 영화 〈기생충〉에서 가족은 지하공간에서 높은 단독주택으로 올라가겠다는 목표 아래 일치단결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에서 가족들은 집주인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숨기기 위해 할머니의 시신을 집 안에 몰래 파묻습니다. 그래야 가족들이 이 집에서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지만 두 영화 모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가진 것 없는 가족이 가족으로 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를 작가적 상상력을 보태 끝까지 밀어붙인 영화들입니다.
〈남매의 여름밤〉은 가는 길이 다릅니다. 가족들은 아무리 채워도 허기와도 같은 욕망에 쫓겨다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각자의 욕망을 순하게 드러냅니다. 남자 친구 마음이 변할까 봐 걱정하던 옥주는 아빠한테 쌍꺼풀 수술을 시켜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봉고차에 짝퉁 신발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하는 아빠한테 그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옥주는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한테 얹혀사는데 고모와 아빠가 할아버지 몰래 아빠 집을 처분해선 안 된다는 분별이 있습니다. 아빠와 고모도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빠가 할아버지네 집에 계속 얹혀살 수 없겠냐는 희망을 비치자 고모는 나도 살자며 집을 팔자고 압박합니다. 그래놓고선 미안함에 가슴을 두드립니다.
서로 미안해하고 측은해하는 아빠와 고모를 보며 관객들은 옥주와 동주도 나이 들면 이렇게 살겠구나 싶어집니다. 모기장 밖으로 한사코 동생을 내쫓던 옥주는 어른들이 없는 집에서 동생을 옆에 재우고 졸음으로 자꾸 떨어지는 동생의 머리를 슬며시 자기에게 기대게 합니다. 

이 가족을 지켜주길

끝까지 말하지 못한 욕망도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옥주의 입장에 이입한 영화는 소녀의 외로움을 절절하게 전합니다. 아빠 차에서 훔친 짝퉁 운동화를 남자 친구에게 신겨준 옥주, 이혼한 뒤 남매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엄마를 미워하는 옥주, 그래놓고 엄마에 대한 꿈을 꾸는 옥주. 그런 옥주를 위로해 준 것은 할아버지의 시선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옥주가 집에 들어오면 맞아주고 나가면 배웅해주는 웃음기 머금은 할아버지의 시선을 의식할 때마다 옥주도 늘 웃고 맙니다. 엄마 없는 집에서 아빠가 일 나가면 동생을 돌보며 학교에 다녀야 했을 옥주가 늘 그리워했던 것은 자신을 지켜보는 그런 따뜻한 시선이었을 것입니다.
작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옥주의 어깨를 보던 관객들도 한 가지 욕심을 내게 됩니다. 아빠와 아이들이 계속 이 집에서 살 수 있게 되기를, 그리하여 옥주나 동주가 좀 더 집에 싸여서 보호받기를, 참다 참다 울음을 터트리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바람은 참으로 우리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볼 때 하게 되는, 그리고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갖게 되는 마음과 비슷합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현실에 가깝습니다. 

남은주 <한겨레> 자유기고가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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