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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72세에 귀주대첩으로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낸 강감찬

강감찬은 거란의 대군을 격퇴한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고려시대의 명신이다. 강감찬은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고 있다.

36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다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948년 금주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현재 서울의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로 학문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강감찬의 부친인 강궁진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강감찬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983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는데 이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 관직에 오르고 1009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26년간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1010년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강감찬은 거란의 2차 침입 때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왕의 피신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하지만 현종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이듬해 1월 거란군이 철수하였다. 현종은 강감찬이 문하평장사에 임명될 때 홀로 피신을 주장한 것을 언급하며 “그때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며 그 공을 평가했다. 

귀주대첩으로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내다

그 후 강감찬은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후 현종은 병을 핑계로 거란의 친조 요구를 거절하고 마침내 1014년 9월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거란의 공격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고려는 거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척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빈틈없는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고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고려 역시 거란의 대규모 침입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이 20만 군대를 지휘한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나아가 기병 1만 여명을 복병으로 배치해 놓고, 흥화진 앞을 흐르던 하천을 소가죽으로 막았다. 그런 다음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 보내고, 복병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흥화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배압은 퇴각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고려군의 총 지휘를 맡은 강감찬은 별동대를 보내 거란군을 정신없이 계속 공격하였다. 강감찬의 공격으로 꽤 많은 병사들이 죽었음에도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다. 결국 1019년 1월 거란군은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까지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개경을 코 앞에 둔 소배압은 강감찬의 계속되는 별동대 공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하여 후퇴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퇴각을 시작하자 강감찬은 전군을 이끌고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각하는 거란군이 강감찬과 만난 곳이 바로 ‘귀주’다. 귀주에서 강감찬의 고려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여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 당시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거란군은 단지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며,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강감찬의 지휘로 거란군의 침략 야욕을 분쇄해 버린 이 날의 전투는 우리 역사상 귀주대첩으로 알려졌다. 승장 강감찬은 당당히 개경으로 개선했다. 현종은 친히 파역까지 나가서 강감찬을 맞이하고, 금화(金花) 8가지를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승리를 이룬 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다

3차 거란의 침입이 종전된 이듬해,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 70세가 넘는 고령에 전쟁터를 다녀왔으니 건강을 해친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강감찬에게 지팡이와 방석을 내려주며 3일에 한번만 출근하도록 명하였다. 
강감찬은 1030년 개경의 주위에 성을 쌓으라는 간언을 올렸고, 1031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려사에서는 강감찬에 대해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사람들이 평소에는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다. 큰 그릇을 만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큰 인물도 오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 바로 강감찬이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고려시대에 36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침입이라는 큰 위기가 발생하자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지금도 노인이라고 할 수 있는 70세부터 강감찬은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 
강감찬은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지만, 거란 침입 때에는 무장으로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는 70대에 거란의 기병을 막는 전술을 연구했을 정도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활기차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이성의 역할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 활동을 중단하면 인간은 인간다운 생명의 끈을 스스로 끊어버리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이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강감찬처럼 진정한 노년을 누릴 권리가 있다. 

김대근·NH농협은행 은퇴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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