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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 벌새

9시 뉴스든, 노래자랑이든, <명랑운동회>든 티브이에 나오는 모든 진행자가 항상 “우리나라는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라는 말로 방송을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온국민이 힘을 합쳐 선진국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단합과 전체동원의 신화는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회사에서든 어느 곳에서나 강력했다. 전쟁을 경험했던 가난하고 배고픈 부모들과는 천지개벽한 듯 다른 삶을 살게 될 거라는 확신, 그렇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급하게 누군가의 다그침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불안. 뒤숭숭했지만 기대에 찬 90년대에서 갑자기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그 다음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벌새>는 2019년 2월 베를린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세계 영화제 34곳에서 상을 받았고 한국에서만 14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제작비 3억원으로 만들어진 이 작은 영화가 2019년 한해를 쉬지 않고 날았던 모습은 그야말로 3그램짜리 몸집으로 가을이면 로키산맥에서 남미대륙까지 수천킬로미터를 날아가는 작은 새 '벌새' 같았다. 

벌새의 집은 어디인가

영화가 시작되면 14살 은희(박지후)가 아파트 복도에 서서 어느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엄마! 제발 문 좀 열어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처음부터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다급하다. 버림받은 아이처럼, 아니면 반대로 집 안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를 부모를 구하러 온 아이처럼. 그러나 곧 은희가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집을 잘못 찾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좀 전에 아기처럼 엄마를 부르던 소녀는 담담히 바로 위층에 있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고, 엄마한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버림받을까봐, 가족이 어느날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나 혼자 남겨지는 날이 올까봐 겁이 난다는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불안은 다만 1994년의 공기 속에,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의 기억 속에 묻혀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이 영화는 한국에선 <벌새>라는 이름으로 개봉했지만 외국에서는 <하우스 오브 허밍버드>, 벌새의 집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은희가 집을 찾는 장면으로 시작했던 영화지만, 갈수록 정말 그 집이 은희가 찾던 그곳이었는지 의아해진다. 강남 대치동 아파트에 살지만 떡집을 하는 은희의 부모님은 삼남매 교육을 일일이 챙겨줄 여력이 없다. 학교에서 잠이나 자는 은희나 성적이 모자라서 다리 건너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에 간 수희(박수연)나 겉돌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오빠 대훈(손상연)만이 “대원외고 거쳐 서울대 가자”는 아버지(정인기)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유일한 자식이고, 대훈은 그 기대가 버거울 때면 은희에게 주먹질로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 자식들에게 툭하면 손을 대는 아버지에게 배운 그대로다. 
그러나 다른 가정폭력을 다룬 영화라면 가족들이 집이라는 이름의 폭력의 틀에 발목을 잡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그렸을 텐데 <벌새>의 가족들은 가끔 부딪치지만 서로의 인생에 깊게 개입하지 않고 다시 스치고 만다. 90년대는 이미 가족이 운명공동체라는 이념은 붕괴하기 시작했고 가부장제만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던 시절이다.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는 인물들 각자가 자기만의 뚜렷한 원을 그린다는 것이다. 집에서 혼자 춤을 추는 아빠, 늘 피로한 얼굴로 먼 곳을 응시하는 엄마, 언니 수희는 종종 밖에서 밤을 새운다. 이들 가족이 마음을 다해서 한 식탁에 앉았던 것은 오직 한번뿐인데, 바로 언니 수희가 성수대교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날이다. 

다리는 왜 무너져야 했을까

그날,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순간, 어떤 사람은 몇 미터를 더 나아갔다는 이유로 죽었고, 누군가는 버스를 놓쳤다는 이유로 살았다. 우리는 ‘그날’을 겪기 전 은희의 세계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야 한다.
<벌새>는 영화를 보는 쾌락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영화의 중심인 은희의 세계엔 불안 속에서도 설렘이 떠돌며, 눈물을 비집는 웃음이, 트램펄린 위에서 방방 뛰다가도 복숭아빛으로 빛나는 은희의 뺨 근처에 혹이 생기기 시작한 것처럼 갑자기 죽음의 이미지가 닥쳐오기도 한다. 그 모순과 균열 사이에서 관객들은 울고 웃는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말하길, 벌새는 “1분에 심장이 1,200번 뛰고, 1초에 80번 날개짓을 한다. 만약 날개를 못 움직이면 10초도 안 되어 죽는 새”라고 했다. 얼핏 집이나 학교에 갇힌 것처럼 보이지만 은희는 마치 벌새처럼 친구와 클럽에 가고, 남자친구와 키스를 실험하며 끊임없이 붕붕거린다. 결정적으로 한문학원에서 은희의 시야를 멀리 있는 대륙으로 넓히는 사람, 김영지 선생님(김새벽)을 만난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는 구호를 복창시키는 학교에서 질식해가던 은희에게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며 어깨를 꾹 눌러주는 선생님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자친구가 자기를 배신해도 그냥 맥없이 돌아섰던 은희는 선생님을 되찾기 위해서는 맹렬히 싸운다.  
불안은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것이 어떤 식으로 올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성수대교의 비극을 아는 관객들은 누군가 죽을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왜 김영지 선생님이어야 했느냐는 의문이 컸다. 김보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평범한 여중생을 영웅처럼 그린 서사라고 평가하는데 영웅을 가르친 스승은 떠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영지는 스승이라기보다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영지와 은희의 어머니는 둘 다 피로하고 지친 인상이지만 은희의 어머니는 은희가 아무리 불러도 딴 곳만 쳐다보는데 김영지는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접고 은희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한 어린 여자아이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서사를 의도한 것 자체가 나에겐 90년대의 정신으로 여겨진다. 1990년대 초중반은 신경숙의 <깊은 슬픔>부터 은희경의 <새의 선물>까지 그런 유의 서사가 홍수를 이뤘던 시절이다. 그때 우리는 거대한 재난을 겪기도 전인데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어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에 몸서리쳤던 것일까. 

고통 뒤에 무엇이 찾아오는가

이런 고통들을 모두 겪기엔, 다시 혼자 남겨지기엔 은희는 너무 어리다. 그러나 그 어리다는 것의 힘으로 아이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도 계속 살아간다. 은희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후배가 금세 마음이 변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돌아온 남자친구를 받아줬던 은희가 다시 “네가 싫어졌다”고 말하는 장면도 그렇다. 
실제 1994년에 중2였을 여자애들은 그 다음해엔 삼풍백화점 붕괴를 겪고, 몇해 뒤엔 IMF로 집안이 풍비박산났을 수도 있고, 죽어라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 뒤에 숨넘어가는 경쟁의 시기를 보내왔을 수도 있다. 
영원한 것은 없고 사랑도 배신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 뒤에도 우리는 슬퍼하고 다시 잊으며 계속 살아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무기력한 시간을 보낸 뒤 그들이 영지와 비슷한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남은주·<한겨레> 자유기고가
사진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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