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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아남은 자의 선택 – 문화충돌의 시기에 위태로운 복수의 세계관을 그리는 영화, <심판>

이러한 불행을 이미 본 적이 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악한 슬픔.
자식을 잃은 아비 어미는 스스로를 때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시간들.

※ 이 글은 영화 <심판>의 결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영화 <아들>(2002, 뤽 다르덴, 장-피에르 다르덴)에서 아비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자신의 일터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숨이 막히는 고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복수를 위한 주먹은 쥐어지지 않는다. 한국영화 <밀양>(2007, 이창동 감독)에서 어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범인을 만나러 갔으나 범인은 이미 스스로를 용서한 다음이었다. 범인을 용서할 권한마저도 빼앗겨버린 것이다. 법과 제도는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지 않고 처분은 국가의 손에 맡겨진다. 행여 복수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우리 보통 인간들이 감히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절망에 몸부림친다. 그러나 파티 아킨 감독의 영화 <심판>(2017)에서 남편과 아이를 잃은 여자는 좀 다른 선택을 한다.

슬픔의 구덩이에 갇혀

<심판>은 폭발로 시작해서 폭발로 끝나는 영화다. 첫 번째 폭발은 카티아(다이안 크루거)의 인생을 날려버렸다. 어느날 카티아는 남편의 사무실에 5살 난 아들을 데려다주고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 친구와 함께 사우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여느때와 다를 것이 없는 날이었다. 다시 운전해서 남편에게 돌아갈 때까지 어떤 불길한 예감도 없었다. 그때 무시무시한 고통이, 상상조차 못했던 상실이, 차라리 죽기를 소망하게 되는 사건이 어떤 예고편도 없이 들이닥친다. 남편 사무실 앞이 경찰차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사무실 안은 남편과 아들 대신 파편과 핏자국 그을음으로 덮여 있다. 영화는 이때부터 주변 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카티아의 얼굴과 카티아의 시선이 닿는 대상에만 초점을 맞춘다.

감독은 “영화가 슬픔에 매몰되지 않도록” 영화를 3부분으로 나누고 각각 가족-정의-바다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가족’편은 누군가가 남편 사무실 앞에서 폭탄을 터트렸고, 남편과 아들이 죽은 뒤 혼자 남은 카티아의 시간을 그린다. 이런 슬픔은 누구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너 때문”이라고 질책하는 남편의 부모님이든, “처음부터 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는 자신의 부모님이든 그녀를 외롭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새로운 생명을 뱃속에 품고 있는 친구를 볼 때면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사무치게 느낀다. 그녀는 황야에 혼자 서 있다. 코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마약을 들이마시고 손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원제, “Aus dem Nichts”는 독일어로 ‘무(無)로부터’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가버린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슬픔의 좁고 긴 구덩이에 묻혀 질식해가던 카티아를 깨운 것은 폭탄테러 용의자가 잡혔다는 소식이었다. 

법정에서 정의를 구하지 말라

애초 경찰은 쿠르드족 출신으로 마약 전과가 있는 남편에 대한 원한 범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사의 초점을 카티아 주변에 맞췄다. 사고가 있던 날 아이를 사무실에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어떤 여자가 짐을 실은 자전거를 사무실 앞에 두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는 카티아의 증언은 그 여자가 독일인이었다는 이유로 무게있게 다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 부부가 폭발물을 사용한 것 같다는 어떤 아버지의 신고로 수사의 방향이 바뀌었고 네오나치주의자인 한 부부가 체포됐다. 그중 여자는 자전거를 세우다 카티아가 마주친 바로 그 얼굴이었다. 카티아는 여자를 목격한 증인으로 함께 법정에 서서 재판을 지켜본다. 폭탄에 뭉쳐진 수백 개의 못폭탄이 얼마나 정확하게 피해자들을 겨냥해 팔 다리를 찢고 터트렸는지 증언하는 고통스러운 재판 과정을 견딘 이유는악이 처벌받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정에 선 범인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고 우익네트워크들은 그들의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어주었으며 법은 그들을 석방한다.
영화는 실제 독일 쾰른에서 국가사회주의 지하조직이라는 신나치그룹이 저질렀던 폭발테러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04년 6월 터키 등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쾰른 뮐하임 지역 한복판에서 5.5 킬로그램 못폭탄이 터져 22명이 크게 다쳤다. 영화에서처럼 당시 수사당국은 우익극단주의에 의한 테러가능성을 배제하고 터키인들 사이 갈등이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았으나, 2011년 국가사회주의 지하조직에 의한 범행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들은 쾰른 사건말고도 2000년부터 2007년 사이 독일 전역에서 터키계 이민자 10명을 연쇄 살인했다.

터키 이민 2세인 파티 아킨 감독은 2번째 대목인 '정의'편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법정을 분노의 시선으로 묘사한다. 실제 사건에선 쾰른테러 범인 3명중 2명은 경찰이 체포하기 전에 자살했고 1명만 재판을 받았다. 영화 속 법정 장면은 자살한 2명과 함께 10건의 살인을 저질러 종신형을 선고받은 베아체췌페의 이미지와 실제 재판 내용을 상당수 참조했다고 한다. 누가 나의 가족을 단지 이민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였다면? 그가 처벌받지 않고 법정을 빠져나간다면?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처벌받지 않는 범죄자들을 욕하고 분노하며 주먹을 휘두른다. 실제로 나한테 그를 처벌할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족을 잃은 슬픔은 유사 이래 늘 있어온 보편적이고 고전적인 슬픔이다. 영화 <심판>에서 이 고전적인 질문은 현실과 만나면서 날카로워진다. 내 가족이 인종차별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현실에서도 화약고처럼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수의 윤리

영화 <심판>에서 테러를 저질렀던 부부는 풀려나온 뒤 극우조직의 비호를 받아 그리스에 숨는다. 주인공의 운명은 주인공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카티아가 그들을 추적하는 이유는 그들이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것, 법과 양심의 틀을 넘어서 개인적인 복수를 실현하는 행위를 옹호할 수는 없다. 그녀가 야차같은 형상으로 가해자들 주변을 맴도는 동안 그동안 끊겼던 생리가 다시 시작됐다. 손에 묻어나오는 피를 쳐다보는 장면, 엄마새가 아기새에게 깃드는 둥지 주변에 차마 폭탄을 설치하지 못하는 장면 등이 지나간다.
그녀는 자신 안에 남아있는 생명의 기색과 씨름한다. 이대로 잊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 그러나 영화는 두 번째 폭발과 함께 끝난다. 카티아가 가해자들을 벌하기 위해 아들의 장난감이었던 경찰 헬리콥터에 못폭탄을 묶는 장면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이슬람식 대응을 떠올리게 한다.
파티 아킨 감독은 독일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러 가해자와 피해자 역할을 모두 백인에게 맡겼다고 했다. “터키인이 이런 복수를 한다면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나는 복수라는 오래된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데, 백인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의 인종적인 특성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권 사이에서 세계는 이렇듯 아직도 아슬아슬하다.
<심판>은 복수에 대한 영화이되, 개인적 복수가 아니라 이대로 폭력이 계속된다면 집단적 복수가 있을 것이라는 위험한 정치적 예고편이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얼굴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 배우 다이앤크루거는 이 영화로 제70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남은주 <한겨레> 자유기고가
사진 월(주)그린나래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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