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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믿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영화〈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2020년을 마감할 때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재개봉했다. 이 영화는 코로나로 상업영화들이 줄줄이 개봉을 미룬 지난 3월에 첫 개봉한 뒤에도 예술영화 전용극장에서 상영을 이어오다가 11월에 다시 개봉했다. 전세계 사람들이 다같이 운이 지지리도 없었던 2020년,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내내 함께 달린 셈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이지만 영화를 읽는 것은 그 시절의 공기이다. 감독의 박복했던 한 시기를 소재로 삼은 영화를, 코로나로 걱정이 많아진 사람들이 보면서 우리가 가진 복이 무엇인지 헤아렸다.

불혹은 무슨!

찬실(강말금)은 한 유명 영화감독(서상원)의 프로듀서로 일하는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감독이 덜컥 죽어버리는 바람에 직업도 없이 어느 달동네에 셋방을 구해서 살게 된다. 언제는 찬실이가 “살림꾼이요 한국영화의 보배”라던 영화사 대표(최화정)는 찬실이는 작업방식이 독특한 감독 한 명하고만 일했던 프로듀서라서 다른 제작현장에는 쓸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한다. 남들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에 찬실이 표현대로라면 “완전히 망했다!”
마흔 된 여자가 이렇게 엎어진 사연은 영화를 만든 김초희 감독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김초희 감독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홍상수 감독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부터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까지 8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영화계에서 두 사람은 알려진 콤비였고, 2016년 홍상수 감독이 프랑스에서 배우 김민희와 함께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찍을 때 김초희 프로듀서가 동행하지 않으면서 홍상수 감독 연출부로 불리던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사실이 영화계에 알려지게 됐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술자리에서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우리 중 가장 바람을 많이 피울 것 같은 사람은?”이라는 질문에 연출부 스태프들이 일제히 감독을 지목하자 감독은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장면은 그래서 뒤끝 있는 코미디다.
찬실이의 화두는 영화지만 갑자기 하던 일에서 밀려나 “대체 왜 그렇게 일만 하고 살았을꼬!” 하고 역정을 내거나, “시집은 못 가도 평생 일은 하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고 청승을 떨게 되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게다가 만난 지 몇 번 안된 감독(배유람)에게 다짜고짜 고백했다가 차이는 경험과 비슷한 것도 누구나 했을 테다. “누가 내 쫌 위로해주면 좋겠나봐요.” 일만 하느라 사랑에 서툴렀거나, 상황에 쫓겨서 성급했거나, 혼자 내달린 결과는 뻔했다. 생활고에 외로움에 망신살까지, 삼재 못지 않은 재앙들이다.

사람도 꽃처럼


영화 속 찬실이의 불운은 여기까지다.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찬실이는 프로듀서 시절 친하게 지냈던 배우 소피(윤승아)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를 하는데 남들이 보기엔 정말 막장이다. 그러나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 소피가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고,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차도 못들어오는 달동네로 이삿짐을 날라주는 장면에서 찬실이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김초희 감독이 영화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반찬가게라도 하려고 했던 시절에 배우 윤여정이 영화 현장에서 부산 사투리 지도라도 하라며 일거리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동료들의 애정이 찬실이가 그동안 쌓은 인덕의 결과라면 굴러들어온 복도 있다. 달동네 셋집의 주인 할머니(윤여정)는 영화 프로듀서가 뭔지도 모르고 찬실이를 그저 한심하게만 보는 눈치였지만 실은 애정과 지혜의 그릇이 아주 큰 사람이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들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할머니의 말은 찬실이가 우연히 펴든 〈임제록〉의 한구절과도 통한다.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서 있는 그곳이 참된 자리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일찍 죽었다는 할머니는 찬실이보다 더 깊은 나락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런 할머니가 한글학교 숙제로 쓴 시 “사라도 꼬처러 다시 도라오며능 얼마나 조케쓰미까(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를 읽다가 찬실이는 그만 울음을 터트린다. 그전에도 여러 번 징징 울었지만 이번 눈물은 지금까지의 박복을 씻어내는 듯 새로 태어나는 듯 깊고 길었다. 찬실이가 왜 울었을까, 여러 리뷰에서 이 질문이 많았지만 나는 이 장면이 찬실이가 영화 밖의 삶에서 진짜 감동을 만나 눈이 뜨이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

사람 복만 터진 게 아니라 귀신 복도 있다. 할머니의 죽은 딸 방에서 홍콩 배우 장국영(김영민)을 만난 것이다. 영화〈아비정전〉에서 맘보춤을 추던 그 모습 그대로 러닝셔츠 바람으로 나타난 귀신 장국영은 찬실이의 연애와 진로를 함께 고민해준다. 그런데 찬실이가 돈이 없지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생뚱맞게 귀신까지 나타나 친구가 되는 이유가 수상하다. “우선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거나 “외로운 건 외로운 거지 사랑이 아니라”는 조언들은 정말 장국영이 한 것일까?
공원에서 웃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찬실이는 “이상하게 할머니들한테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 까먹고는 못사는 그런 세월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찌 저리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웃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이 든 여자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성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할머니는 아이들을 키워주는 모성적 존재이자 저렇게 지난 세월을 잊고 웃을 수 있다면 나이 들어도 좋겠다는 이상형이 된다.
반면 장국영은 순정을 다 바쳐 영화를 사랑했던 찬실이의 한 시절과도 같은 존재다. 과거 또한 사라지지 않고 찬실이의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말하자면 겹겹이 쌓는 러시안 인형처럼 할머니와 장국영은 찬실이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그 증거로 장국영이 우주로 떠나간 뒤 찬실이가 전구를 사러 어두운 길을 내려가다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이라고 중얼거릴 때 찬실이의 가슴께가 불이 켜진 듯 환하게 비춰진다. 가난할수록 눈이 더 밝아진 찬실이의 깨달음이 어디 다른 곳에서 온 게 아니었듯 찬실이의 복은 찬실이에겐 찬실이가 있다는 사실인 것 같다. 우리도 그렇다. 

남은주 <한겨레> 자유기고가
사진 찬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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