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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의<옥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물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향수> 중에서
죽을 길과 살 길은 포개져 있다

1996년 정지용 생가 옆에 문을 연 정지용문학관은 정지용 문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문학전시실과 영상실, 문학교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한동안 우리에게 시인 정지용은 없었다. 그저 문학사의 한 페이지에나 ‘정○용’으로 표기되는 금기의 시인이었다.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우리에게 잊혔던 정지용의 시편들은 30년이 지난 1988년에야 겨우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해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인 ‘지용회’에서는 충북 옥천군 그의 생가터에 자그마한 기념판 하나를 새겨 넣었다. 지용유적 제1호 - 명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1902년 5월 15일(음력) ‘실개천’ 가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새 집이 들어섰다. - 1988년 6월 25일, 지용회 이어 1996년 옥천군에 의해 그의 생가가 복원되고, 2005년 그 곁에 정지용문학관이 건립됨으로써 시인의 귀향은 비로소 완결을 이루었다. 그와 함께 옥천 사람들 역시 커다란 자부심 하나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옥천 구읍의 아침 풍경. 이른 아침부터 집 앞 텃밭을 가꾸는 노부부에게서 비록 풍경은 바뀌었어도 여전하기만 한 ‘향수’를 느낀다.
정지용은 옥천읍 죽향리 하계마을에서 태어났다. 흔히들 ‘구읍’이라고 부르는 죽향리는 지금도 드문드문 일본식 건물과 낡은 집들이 눈에 띄는 한적한 시골마을이지만,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옛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인다. 생가 앞으로 여전히 실개천은 흐르지만, 그 물빛부터 예전과는 다르다. 다만 시멘트로 복개된 천변길로 간혹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가벼운 뜀박질만이 그때의 모습을 얼핏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는 정지용이 다니던 옥천공립보통학교의 후신이다. 지금도 이 학교의 운동장 한쪽에는 그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사용되었던 교사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시인의 어린 시절을 희미하게나마 짐작게 한다. 옛 교사는 현재 교육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시인 정지용은 절제된 감정과 사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 그리고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빚은 시편 등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하였다. 김기림은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까지 극찬했다. 생가 옆에 지어진 정지용문학관은 이런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고, 대표적인 작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감상하며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장계관광지에는 정지용문학상 시비 등 시비길이 조성되어 있다.
문학관 전시실에서는 ‘지용 연보’나 ‘지용 문학지도’ 등을 통해 시인의 삶의 자취와 함께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정지용 시인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을 입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손으로 느끼는 시, 영상시화, 시낭송실 등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정지용의 시세계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이 밖에 영상실, 문학교실 등도 정지용문학관의 중요한 공간들이다.

장계관광지 가는 길에 만나는 카페 호반풍경은 대청호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그의 생가와 문학관을 중심으로 지용제가 벌어진다. 그때쯤이면 옥천군은 말 그대로 ‘문학과 예술의 고장’이 된다. 하지만 올해 지용제는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9월 22일부터 25일까지 정지용생가 및 정지용문학공원 일원에서 열린다. 그때를 기다리며 키 큰 참나무들 사이로 고향마을을 그윽이 내려다보는 그의 동상 좌대에는 늘 가슴에 사무치는 한마디가 새겨져 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100리길 여행

용암사 천불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마애불이 나오고, 다시 그 옆으로 난 데크길을 따라가면 일출을 조망할 수 있는 운무대에 이른다. 용암사 일출은 미국 CNN go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50곳’에 포함될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정지용의 고향마을을 ‘회돌아’ 나온 실개천은 여기저기서 모여든 작은 물줄기들과 함께 금강에 합류한다. 그리고 금강은 대청호에서 잠시 제 몸을 가둔다. 그래서 정지용 문학기행은 당연히 구읍의 생가와 문학관에서 시작, 금강을 따라 흘러간다. 아니, 금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길은 옥천의 ‘넓은 벌’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금강 물줄기를 따라가는 ‘향수 100리길 여행’은 군북면 추소리 부소담악에서 시작한다. 본래 산이었으나 대청댐 준공으로 산의 일부가 물에 잠겨 마치 물 위에 바위가 떠 있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 부소담악의 암봉들은 우암 송시열이 ‘소금강’이라 예찬하였을 정도로 예부터 옥천 제일의 선경을 자랑한다. 2008년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한국을 대표할 만한 아름다운 하천 100곳’ 중 하나이다. 옥천의 금강은 장계에서부터 금강유원지까지 거슬러 오르는 구간에서 가장 싱그러운 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으로 치자면 청소년기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자연뿐만 아니라 견지로 쏘가리를 낚고, 우산으로 피라미를 잡는 사람들의 풍정 또한 풋풋하기만 하다. 대청호반이 한눈에 장계관광지에는 향토전시관과 함께 작은 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정지용이 남긴 문향(文香)을 느낄 수 있다. 옥천읍 삼청리의 용암사는 일출명소로 유명하다. 동틀녘 용암사 운무대에 오르면 운해와 일출이 어우러진 장엄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꼭 일출이 아니더라도 운무대에서 바라보는 옥천의 그윽한 산야는 곧 <향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 창건된 천년고찰로, 고려 때 조성된 동서삼층석탑과 마애불이 있다. 현재 당우의 건축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자연과 어우러지는 산사의 전통건축미를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집이다.
글·사진 유성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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