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건강

‘생활습관병’ 잡아야 건강 튼튼 노후 든든

든든한 노후를 위해 정확한 정보를 알고 제대로 실천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휴가철이 지나고 점검해야할 것들, 여성질병, 시력에 관해 일상에서 겪는 건강 관련 궁금증과 최신 의학 정보를 소개해드립니다. 장시간 같은 자세는 피하고 틈틈이 스트레칭 해야 휴가철에 도시를 벗어나 산이나 바다를 찾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집 안에서 나만의 피서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바로 척추·관절에 발생하는 통증 질환이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고 제대로 치료받지 않으면 자칫 만성 질환이 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도로 정체로 인해 한 자세로 장시간 운전하게 되면 허리에 쉽게 피로가 쌓인다. 이때 쌓인 피로를 제때 풀지 않고, 지속적으로 부담을 주면 주변 근육이 경직되고 유연성을 잃게 돼 허리 통증이 발생한다. 더구나 이 상태로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해서 야외활동을 하게 되면 관절과 근육이 자극돼 허리 통증이 악화될 수 있다.휴가철에 장시간 운전을 해야 한다면, 휴게소나 졸음 쉼터에 들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스트레칭을 해줘야 한다. 비행기를 이용할 경우라면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통로를 오가며 몸을 움직이는 것이 허리 통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 요즘엔 도시 근교의 워터파크로 피서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워터파크는 물기로 인해 바닥이 미끄러운 곳이 많아 넘어지면 큰 부상으로 이어지기 쉽다. 넘어지면서 발목이 꺾이거나 인대가 손상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증상이 심해지면 발목 연골이 손상되면서 발목관절염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집에서 휴가를 보내는 경우에도 안심할 수는 없다. 마우스를 쓰면서 장시간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손이 저리고 감각이 둔해지는 ‘손목터널증후군’을 겪을 수 있다. 허리를 구부린 상태로 오랫동안 피규어를 조립하다가 급성요통이나 관절 통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삐딱하게 눕거나 앉은 자세로 TV를 시청한다면 거북목 증상을 조심해야 한다.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에도 장시간 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피하고 자주 자세를 바꿔주면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거북목 증상을 예방하려면 모니터나 휴대전화기를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사용할 것을 추천한다. 근육이 뭉치지 않도록 가벼운 스트레칭을 자주 하는 것도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휴가 중에 발생하는 통증을 일시적인 증상으로 생각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초기에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디스크 등으로 발전할 수 있는 만큼 전문의와 상담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 발병률·재발률 높아…증상에 맞는 치료 중요 여성들이 한 달에 한 번 주기로 겪는 생리. 유난히 생리통이 심한 경우라면 자궁내막증, 자궁근종, 난소종양 등을 의심할 수 있다. 특히 자궁내막증은 극심한 생리통, 만성적 골반 통증, 성관계 시 통증의 원인질환으로 꼽힌다. 자궁내막증은 자궁 안에 있어야 할 자궁내막 조직이 나팔관이나 복막 등의 부위에 생기는 것을 말한다. 생리혈 중 일부가 배출되지 않고 난관을 통해 역류해 복강 내로 들어가는데, 이때 역류한 생리혈이 난소나 기타 복강 내 여러 장소에서 병변을 형성하게 된다. 자궁내막증은 초경부터 폐경까지 전 연령대에서 발생하는데, 특히 가임기 여성에게 주로 나타난다. 최근 들어 발병률도 증가 추세다. 자궁내막증이 생기면 염증반응으로 인해 난소와 주변 장기가 붙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골반 내 유착은 나팔관의 원활한 운동을 방해하고 수정 후 배아가 자궁 내로 유입되지 못하게 막는다. 그러다 보니 임신 가능성도 낮아지게 된다. 자궁내막증의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면역 기능이 저하된 경우 △가족력이 있는 경우 △여성호르몬 중 난포호르몬이 과다한 경우 △월경주기가 27일 이하, 월경기간이 7일 이상인 경우 △생리량이 많은 경우 △초경이 빠른 경우 등이 위험 요인으로 알려졌다. 자궁내막증은 가임기 여성에서 흔히 발병한다. 또 재발률도 높다. 초기에 발견해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치료법은 크게 약물요법과 수술요법으로 나뉘는데, 질환의 경중도와 증상, 임신계획 등을 고려해 진행한다. 불임이 의심된다면 수술로 자연임신 가능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만 4세 이전에 치료하면 95% 정상시력 회복 출생 직후 아이는 큰 물체의 유무 정도만 어렴풋이 감지할 정도의 시력을 보인다. 이후 서서히 시력이 발달하는데 이상이 없는 경우라면 만 5∼6세 정도에 교정시력이 1.0에 도달한다. 보통 10세 전후로 소아의 시력은 발달을 멈추는데, 이전에 이상이 있다고 느껴지면 안과 검진을 해야 한다. 특히 고도원시, 근시, 부동시 등 굴절이상 약시나 사시가 동반된 아이는 만 4세 전후에 시력검사를 진행할 것을 추천한다. 그러나 영아 내사시, 굴절조절 내사시, 중증도 약시는 조기에 발견해야 한다. 다른 사시나 약시 환자보다 시력 예후가 나쁠 수 있어 빠른 진단과 치료가 이뤄져야 한다. 소아는 주관적인 시력 측정 결과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고 변동이 심하다. 영아일수록 검사 협조가 되지 않고 증상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해 진단이 늦어진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TV나 책 등을 볼 때 눈을 찌푸리거나 너무 가까이서 보려고 할 때, 보호자와 눈을 잘 맞추지 않을 때, 비정상적인 고개 기울임을 보일 때 시력저하를 의심할 수 있으니 반드시 안과를 방문해야 한다. 소아 약시 치료는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만 8세 이상에 치료를 시작하면 정상시력 회복을 보이는 경우가 23%에 불과하지만 만 4세 이전에 시작하면 95%가 정상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 약시 치료는 안경을 착용해 굴절 이상을 교정하는 방법을 택한다. 한쪽 눈에만 약시가 있다면 정상 눈을 일정 시간 동안 가려주거나 약물을 넣어 약시가 있는 눈의 시력발달을 유도하기도 한다. 드물게 발생하는 소아 백내장이나 눈꺼풀 처짐 등 시자극을 방해하는 질환은 수술을 고려하기도 한다. 글 이정윤·의학신문 기자 (자료제공 전원생활)

인물

66세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한 미켈란젤로

위대한 조각가이자 화가, 건축가던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대 거장 중 한 명이다. 원래 조각가던 그가 시스티나 성당 벽면에 그린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을 때의 나이는 66세다. 24세에 조각으로 거장이 되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그가 6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어렸을 때는 시골에 있는 유모의 집에 맡겨졌다.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후에 조각가로서의 재능이 두드러지게 되는 데에 큰 향을 주었을 것이다. 마을 행정관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인 미켈란젤로가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공부를 하길 원했지만, 그는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즐거운 아이다. 하지만 당시는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던 시기다. 그래서 집안에 예술가가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아버지와 삼촌들은 매를 때려가면서 반대했지만, 미켈란젤로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미켈란젤로는 13세 때 당시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도제수업을 받는다. 일년을 스승 밑에서 배우다가 그림에 싫증을 내고 조각을 원해,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조각 학교에 입학한다. 천재적인 재능은 일찍 발견되었다. 메디치 가의 로렌초 공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눈여겨보았고, 그의 배려로 피렌체의 뛰어난 예술가와 미술 수집품을 보며 성장했다. 24세에 그는 ‘피에타’라는 조각작품으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현재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이 작품은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성모상에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 그의 유명한 조각상 중 또 다른 작품에는 ‘다비드’가 있다. 이 작품은 원래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놓여져 있다가 공해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현재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압제에 대한 피렌체 공화국의 승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중년에 새롭게 도전한 회화 미켈란젤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교황의 지시를 받아 작업을 했다. 그중에서도 교황 율리우스 2세와의 관계는 미묘했다. 두 사람은 마치 형제처럼 다정했다가 불화가 반복되는 그런 관계다. 율리우스 2세는 당시 벽화의 기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한다. 미켈란젤로의 평전을 쓴 로맹 롤랑은 미켈란젤로를 질투하던 브라만테가 교황의 총애를 받는 미켈란젤로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교황에게 그를 추천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고, 그의 명예가 실추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림에 익숙하지 않고 교황에게 보수도 받지 못해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던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완성했다. 저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 교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화작품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꼽았다. 하지만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작업 때가 미켈란젤로의 개인사에서 가장 우울했을 때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일단 그가 회화라는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천장화였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하면 회반죽이 떨어지기 일쑤였고, 그림을 그리려고 자세를 잡는 것도 힘들었으며 전체적인 구도를 살피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가의 고통은 바로 감상자의 희열이 된다는 진리를 증명이라고 하듯, 처음 도전한 회화에서 엄청난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된 도전과 창조 ‘천지창조’와 더불어 시스티나 성당 벽면에 그린 벽화 ‘최후의 심판’은 그의 나이 60세에 작업을 시작해서 66세인 1541년에 완성하였다. 또한 현재 바티칸에 위치한 성베드로 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된 1546년에는 그의 나이 71세였다. 미켈란젤로가 처음 성공한 분야는 조각이었지만 40대에는 화가, 60대에는 건축가로 나이가 들어도 그의 도전과 창조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론다니니의 피에타’라는 조각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작업장으로 갔다가 제자의 등에 업혀 오기를 여러 차례 하기도 하였다. 이런 창작의 고통 속에서도 그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초인적인 열정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도 환희와 희망을 보고, 감동하고, 앞으로 살아갈 의지를 마음속에 품게 된다. 사람들은 예술과 천재성의 관계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예술가의 천재성은 젊은 나이에 꽃을 피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피카소와 라파엘로 같이 젊은 시절 일찍부터 성공의 가도에 올라선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런 젊은 천재들과 달리 40~50세가 넘어 성공을 거머쥔 예술가도 적지 않다. 오히려 예술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한순간의 천재적인 재능에 의존하기보다는 끊임없는 노력과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작품에 담아냈다. 미켈란젤로도 마찬가지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피에타’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40대 이후에 완성되었다. 60대 이후에도 ‘최후의 심판’이나 성베드로 성당과 같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예술작품도 한 인간의 철학적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나이 든 예술가도 젊은 예술가만큼이나 혁신적으 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글 김대근·NH농협은행 은퇴연구소 선임연구원

여행

바다는 희미하다 – 부산 원도심 스토리투어

바다는 희미하다 구공탄 화덕 위 석쇠의 먹장어가 노릇해진다 대선소주 한 병과 원통형 술잔 두 개 난로 대용 쇼트닝 깡통이 있다 내리치면 힘없이 부서질 듯한 의자에 의자 같은 청년 둘이 앉아 있다 그들은 고뇌하고 있다 아니 그들은 고해하고 있다 디오니소스에게 -이승원 중에서 학창 시절, 부산을 바라보는 ‘창(窓)’은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들이었다. 그중 하나인 을 사진 그대로 옮길 수 없어, 사진을 보고 쓴 시인의 시로 대신했다. 예전부터 용두산공원이거나, 영도다리거나, 자갈치시장이거나, 광안리 바닷가거나, 부산에만 가면 왠지 건들건들해졌다. 그것은 어쩐지 낭만적이고, 어쩐지 풍류적이고, 어쩐지 부산하고, 어쩐지 잡다한 그 도시의 분위기 탓이었으리라. 그를 ‘해양성 기질, 해양성 문화’라고 풀기도 하지만 그 속내에는 그만한 삶의 뿌리가 자리하고 있다. 부산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그 많은 시장과 산복도로들이다. 그리고 그 연유는 대부분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가뜩이나 ‘산을 등에 업고 바다를 가슴에 안느라’ 비좁기만 한 땅이 피란민들로 가득해지면서 산비탈은 판잣집들로 뒤덮이고, 무엇이라도 내다팔아야 할 사람들로 시장은 북적였다. 이 시절 불과 몇 년 사이에 부산 인구는 두 곱 넘게 늘어났다. 그들은 낮이면 자갈치시장이나 국제시장, 부평깡통시장쯤에서 ‘장사치기’를 하거나 하다못해 지게 품팔이라도 하면서 끼니를 때우고, 밤이면 산복도로로 돌아가 잠을 잤다. ‘산복도로(山腹道路)’는 산 중턱을 지나는 도로를 이르는 말이지만, 부산에서 산복도로는 그냥 찻길이 아니라 아예 산동네 전체를 이르는 고유명사다. ‘초량동 산복도로’에 산다고 하면, 도로 한가운데 사는 게 아니라 그곳 산동네에 사는구나 하는 것을 부산 사람들은 다 안다. 전쟁 때 피란민들로 형성된 산복도로는 전후 산업화시기 이농 이주민들로 이어지면서 부산의 독특한 주거문화를 이루어왔다. 그리고 원도심의 시장들과 함께 애환으로 점철되던 그 ‘풍정’들은 세상이 바뀐 지금까지도 여전히 부산을 상징하는 ‘풍경’들로 남았다. ‘깡깡이길’ 지나 ‘흰여울길’로 길의 시작은 로 ‘유서 깊은’ 영도다리(정확히는 영도대교)고, 다리 건너 봉래산 기슭의 산동네이자 영화 의 촬영지인 흰여울마을을 찾아가는 길이다. 다리를 건너면 가수 현인의 노래비가 서 있고, 오른쪽으로 선박수리소가 몰려 있는 도선장길이 나온다. 이른바 ‘깡깡이길’이다. 망치로 선박의 찌그러진 부분을 펴는 작업을 할 때 ‘깡깡’ 소리가 난다 해서 이름 붙여진 깡깡이길은 부산시에서 조성한 ‘원도심 스토리투어’ 1코스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아낙들이 이곳에서 ‘깡깡이질’로 생계를 유지했다. 안전장치 없이 허공에 매달린 널빤지에 앉아 하루 종일 쇳가루를 들이마시며 망치질을 하다 보면 때론 난청이 된 아낙도, 때론 널빤지에서 추락해 불구가 된 아낙도 많았다. 그때의 고달픈 깡깡이 소리는 사라지고, 크레인을 타고 산더미처럼 높은 배 위에 올라 작업을 하는 인부들의 모습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윽고 길은 절영해안도로로 이어진다. 영도의 원래 이름인 ‘절영도(絶影島)’에서 따온 절영해안도로는 영선동에서 동삼동 중리해안까지 약 3km에 이르는 아름다운 해안산책로다. 그리고 이 길은 초반 300m 정도 흰여울마을에 이르는 흰여울길과 겹쳐진다. 이제 몇 안 남은 영도 해녀들의 작업장 탈의실 옆으로 난 ‘맏머리계단’을 오르면 온전히 흰여울마을이다. 계단 높이만큼 바다는 멀어지고 하늘은 가까워진다. 흰여울마을에서 이송도전망대에 이르기까지 ‘맏머리계단’ 말고도 ‘꼬막계단’, ‘무지개계단’, ‘피아노계단’ 등이 하늘과 땅을 오가며 서로를 이어준다. 흰여울길은 한쪽으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절벽과, 다른 한쪽으로 담장 너머 아련한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다. 집들은 미로 같은 골목으로 이어지고, 열린 문으로 밥 짓는 냄새가 금방이라도 몸에 배어들듯 지척이다. 먼 바다에는 하릴없는 배들이 점점이 떠 있다. ‘선박 주차장’인 묘박지(錨泊地)라고 했다. 절박은 그 위치에 의해 때론 절경으로 바뀐다. 여울 같은 길을 꿈결처럼 따라가다 보면 이내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을 인 ‘흰여울안내소’가 나타난다. 영화 의 배경이 된 집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송우석(송강호 분) 변호사의 단골 국밥집 주인 최순애(고 김영애 분)의 집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굴곡진 현대사의 한 구비가 펼쳐진다.“니 변호사 맞재? 변호사님아, 니 내 쫌 도와도.” “이런 게 어딨어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할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다.” 국제시장과 헌책방골목 다시 영도대교를 건너 자갈치시장으로 향한다. 자갈치시장은 부산에서 가장 큰 바다다. 아니 가장 큰 바다였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자갈치 아지매들의 활력으로 넘쳐나던 자갈치시장은 현대화사업이 진행되면서 외려 활기를 잃어버렸다. 일제강점기 때 매립공사를 통해 남항이 건설되면서 소형 고기잡이배들이 내놓은 수산물을 파는 노점들로 비롯된 자갈치시장은 오랫동안 이른바 ‘판때기장수’라고 부르는 아지매들의 힘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그들이 자꾸만 한쪽으로 밀려나고, 그들의 활력 대신 ‘상권’이 자리를 차지한 지금의 자갈치시장은 마치 방파제에 갇힌 바다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시장 한켠의 선술집에 자리를 틀고 앉아 꼼장어 한 접시에 소주를 곁들이면서 ‘1981년’의 희미한 자갈치시장을 그려본다. 자갈치시장에서 길 건너 BIFE거리를 지나면 부평깡통시장과 마주한 국제시장이다. 국제시장 역시 동명의 영화 때문에 유명세를 탔다. ‘한국전쟁 이후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들은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 영화의 긴 선전문구이지만,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이라 우리가 겪는 기 참 다행이다’라는 대사에 대한 한 젊은 영화평론가의 ‘토 나오는’ 반론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어쨌거나 영화에 등장한 ‘꽃분이네’를 비롯한 국제시장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아날로그세대’인 나는 차라리 국제시장 끄트머리에서 시작하는 보수동 책방골목이 훨씬 편안하고 따뜻하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이북에서 피란 온 한 부부가 보수동 골목 안 목조건물 처마 밑에 박스를 깔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와 만화, 고물상으로부터 수집한 각종 헌책으로 노점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보수동 책방골목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보수동 책방골목 역시 외국인 관광객을 비롯한 구경꾼들이 태반이지만, 그 또한 핀잔할 일은 아니다. 여행 역시 책과 같아서 때론 새로운 것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오래된 추억을 뒤적이는 기쁨 또한 만만치 않다. 책방골목 초입의 보수서점 간판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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