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고창의 봄맞이
고창은 산과 바다, 강과 들이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땅이다. 전국 최대의 바지락 산지 하전갯벌, 풍천장어의 본향인 인천강, 선사시대 고인돌이 군집한 너른 들판…. 그러나 이 봄, 우리가 고창을 찾는 이유의 8할은 선운사
동백꽃이리라. 아직 일러 피지 않았어도, 눈물처럼 후두둑 진 후라도, 시인가객의 마음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했던 그 붉은 꽃잎들.
3월, 선운사 동백은 아직 꽃망울만 머금었을 뿐 봉우리를 터트리지 않았다. 선운사 동백(冬栢)은 기실 춘백(春栢)이다. 동백꽃은 4월에 들어서야 만개하며, 동백꽃이 서서히 시들어갈 무렵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직은 그리움으로만 봄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선운사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상춘곡(賞春曲)’이 아니라 ‘대춘부(待春賦)’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도 그리움으로.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동백은 그 탐스러운 꽃송이로 남녘의 겨울 끝자락에 붉은 점을 찍는다. 선운사 동백은 4월에 만개해 세상에 봄이 왔음을 정히 알 린다.
선운사 동구에서 어김없이 미당(未堂, 서정주)의 시비를 만난다. 누군들 그 육자배기 가락을 모르겠는가. 한때 ‘시(詩)의 정부(政府)’라 불렸던 시인의 영화는 친일과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논란 속에 부질없이 시들어버리고, 지금 그의 절창은 육필을 새긴 빗돌로만 남아 있다. 그것도 잔뜩 목이 쉰 채. 그래도 선운사 만행(萬行)의 시작은 여전히 그의 시비에서부터일 수밖에 없다.
선운산(일명 도솔산)에 자리한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대웅보전, 지장보살좌상 등 국보급 불교문화재들을 줄줄이 지니고 있으며, 동백숲을 비롯해 송악, 장사송 등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간직하고 있는 전설과 비의(秘意) 또한 가득하다. 진흥굴은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수도했다는 굴이며, 동불암 마애불은 동학혁명 때의 비결탈취사건으로 유명하다.
절 들머리의 부도밭은 선운사의 정신을 상징한다. 조선후기 대선사인 백파율사의 부도와 함께 추사(秋史, 김정희) 필적의 부도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에는 석전스님의 부도가 서있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논쟁을 나누다 가까워진 추사와 백파, 그리고 그들이 누대 동안 남겨놓았던 아호를 이어받은 석전이 이제는 모두 다만 한 개씩의 작은 돌덩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선운사를 선운사답게 하는 것은 철마다 피어나는 꽃들이다. 동백꽃은 이를 것도 없고, 봄의 벚꽃과 유채꽃, 배롱나무 붉은 꽃이 활짝 피는 여름이며, 온산 단풍으로 물들기 전 지천으로 피어올리는 석산(꽃무릇)과, 겨울이면 눈꽃으로라도 피어나는 꽃들이다. 그래서 한 가객은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라고 묻고 또 묻는 것이리라. 누구는 선운사를 ‘흘러간 절’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운사는 무시로 피고 지는 꽃들로 해서 여전히 그립고 그리운 절이다.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들 때문에라도 말이다.
선운사 천왕문. 봄은 오는데 스님은 또 어디로 길을 떠나는가.
선운사 동구. 3월의 선운사는 아직 이르지만, 그리움 속에 봄을 그려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거기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상춘곡’이 아니라 ‘대춘부’다.
고인돌공원과 운곡습지
고인돌공원의 고인돌들이 따스한 봄볕 아래 평화롭게 누워있다.
운곡습지에는 고인돌공원에서 운곡저수지에 이르는 약 4.6km 구간의 탐방로가 설치되어 있어 숲속을 직접 걸으며 습지를 체험할 수 있다.
‘한국인의 본향’이라는 고창은 선운사보다 더 오래된 시간들로 봄을 맞는다. 죽림리와 상갑리 일원에는 선사시대의 고인돌들이 ‘떼’로 몰려 있다.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9.5㎞ 남짓한 지점에 자리한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 내에 447기가 분포되어 있고, 이를 포함한 지정보호구역의 면적이 57만3,250㎡로 산재한 고인돌은 2,000여기에 이른다. 이 같은 지석묘의 밀집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2000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도산리 일원에는 고인돌공원이 조성되었다. 야트막한 언덕바지에 평화롭게 누워 있는 고인돌 군락을 보노라면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라는 박두진의 시 ‘묘지송’이 절로 떠오른다.
고인돌공원에 이웃한 오베이골의 운곡습지 역시 고창의 깊숙한 속내를 보여준다. 해발고도가 낮은 구릉지의 곡저부에 형성된 운곡습지는 2011년 우리나라에서 16번째로 람사르습지에 등록되었고, 2013년에는 고창군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오베이골은 과거 논으로 경작되던 지역인데 1981년 영광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로 쓰기 위한 운곡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마을사람들은 고향을 떠났고, 원자력발전소는 냉각수의 수질관리를 위해 이 일대에 철조망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제한했다. 더욱이 2000년 고창고인돌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면서 오베이골 주변 또한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이 역시 오베이골이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는 원인이 되었다. 그 후 이 지역에는 원시 밀림과 같은 비경의 습지가 형성될 수 있었다.
고창은 산과 바다와 강과 들이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땅이다. 하전갯벌은 전국 최대의 바지락 산지이고, 선운산을 거쳐 줄포만으로 흘러드는 인천강은 ‘풍천장어’의 본향이다. 풍천장어는 복분자주와 어우러져 고창 먹거리의 신화를 낳는다. 전국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고창수박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또 공음면의 학원농장은 봄이면 드넓은 청보리밭으로, 가을에는 하얀 메밀꽃밭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이처럼 고창의 산수는 무량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순정한 마음이리라.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