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건강

건강한 일상을 위한 의학 상식

건강 관련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에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제대로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일상에서 겪는 건강 관련 궁금증과 최신 의학 정보를 알아보자. 소화기내과 위염, 가볍게 볼 일 아냐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1명이 위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위염은 흔한 질병이지만, 만성위염에서 위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진 만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위염은 크게 급성위염과 만성위염으로 분류한다. 급성위염은 주로 감염에 의해서 발생하는데 헬리코박터균의 최초 감염, 세균·바이러스·기생충 등에 의해 발병한다. 알코올이나 진통제와 같은 약물에 의해서도 위 점막에 염증이 생겨 위염이 되기도 한다. 만성위염은 염증이 3개월 이상 장기적으로 지속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위의 만성염증은 정상적인 위샘을 소실시켜 위축성 위염을 유발하고 장상피화생을 거쳐 위암의 위험성을 높인다. 만성 위축성 위염은 위의 위축이 발생하는 부위와 발생원인에 따라 A형과 B형으로 나뉜다. A형은 자가면역력과 연관되거나 위의 체부에 발생하며, B형은 주로 헬리코박터와 관련되고 위의 하단에 발생하여 점점 체부 쪽으로 진행한다. 실제 우리나라 만성 위축성 위염의 대부분은 B형 위염으로 알려졌다. 급성위염은 명치 부위의 통증과 함께 오심 및 구토가 동반되고, 상한 음식 또는 약물을 복용하거나 과음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만성위염은 증상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비특이적으로 배 윗부분의 통증이나 식후 복부팽만감 및 조기포만감 등이 나타나는 등 다른 소화기 질환과 증상이 비슷하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위암 발병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고 내시경검사는 위염과 함께 궤양 및 암까지 한 번에 진단이 가능해, 증상이 있다면 위내시경을 권장한다. 치료 방법 또한 급성과 만성을 구분해서 진행한다. 급성위염은 증상을 악화시키는 자극적인 음식이나 음주, 흡연을 삼가고 생활습관을 교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만성위염의 경우, 식습관 개선이 필수적이고 증상완화를 위한 내과 치료가 도움이 된다. 다만, 약물치료가 근본적인 치료는 될 수 없고 위암을 조심해야 하는 만큼 정기적인 내시경검사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감염에 의한 위염이 아닌 경우 식습관의 관리만으로 증상이 완화되는 경우가 많다. 한때 유행했던 ‘단짠단짠’(달고 짠 음식을 반복적으로 섭취)의 경우 위에 강한 자극을 지속적으로 주기 때문에 절제하는 편이 좋다. 피부과 2030 여성 탈모, 해결 방법은? 인간의 모발은 수명이 있어 끊임없이 빠지고 새로 난다. 하루에 50∼100개 정도 빠지는 것은 정상이다. 그러나 자고 나서 혹은 머리를 감을 때 모발이 100개 이상 빠져 머리숱이 적어지면 ‘탈모’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여성 탈모는 남성 탈모와 다르게 앞머리 이마선이 퇴축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마 위 모발선이 유지되며 상대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정수리의 모발이 가늘어지고 숱이 적어지는 특징을 보인다. 그동안 탈모는 유전자와 호르몬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여성 탈모가 남성 탈모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환경적 요인으로 탈모 발생이 늘면서 여성들도 더는 탈모에서 안전하지 않다. 20∼30대 여성의 탈모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는 잦은 파마나 염색, 드라이기 사용, 다이어트, 스트레스 등이 있다. 최근에는 미세먼지도 모발 손상을 악화시켜 탈모에 영향을 주는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단기간 체중감량을 위해 음식섭취를 제한하는 다이어트는 탈모의 주범으로 꼽힌다. 다이어트로 모발 성장에 필요한 미네랄과 단백질, 필수지방산, 비타민B가 부족해지면 영양불균형으로 모낭이 부실해지게 된다. 그로 인해 모발이 가늘어지고 모주기가 짧아져 탈모로 이어진다. 여기에 무한경쟁으로 학업, 취업 스트레스가 증가하면서 스트레스 또한 여성 탈모의 또 다른 원인으로 주목받는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교감신경 흥분상태가 지속돼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깨지고, 두피근육과 혈관은 수축하며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을 분비한다. 이는 두피로의 영양공급, 혈액순환, 산소공급 등을 어렵게 만들어 탈모를 유발시킨다. 모발이 많이 빠지는 게 느껴지면 병원을 찾아 모발의 상태를 진단받는 것이 좋다. 탈모는 치료가 늦어질수록 증상이 악화돼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들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파마나 염색, 드라이기 사용을 피해 두피 자극을 줄이고 금연과 금주, 자외선 차단으로 건강한 두피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안과 젊은 실명 부르는 포도막염 포도막염은 더위에 체력이 떨어지고 면역력이 감소하면 발병하기 쉽다. 또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쉽게 증식해 감염위험성이 높아 주의가 필요하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눈의 핵심 구조물은 망막·각막·수정체 정도지만, 이들을 돕는 보조적 기관인 ‘포도막’이 있다. 안구벽의 중간층을 형성하는 것으로, 홍채·섬모체·맥락막 세 부분으로 나뉜다. 포도막은 결합한 조직이 많고 혈관이 풍부해 염증이 생기기 쉽고 눈에만 국한된 질환이 아닌, 몸 전체와 연결된 류마티스성 질환이나 혈관염과 같은 전신질환과 연관된 경우가 매우 많다. 포도막염은 노화와 관계없이 남녀노소 발병하기 때문에 방치할 경우 젊은 나이에도 실명까지 이를 수 있다. 포도막염은 대부분 원인을 알 수 없다. 원인이 밝혀지는 경우는 자가면역이상에 의한 류마티스성 질환, 예를 들면 베체트병이나 보그트-고야나기-하라다 병, 혹은 강직성 척추염 등과 같은 비감염성 면역질환과 동반되어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백내장, 녹내장 등을 초래할 수 있고 특히 시신경이나 망막의 황반 부위까지 손상되는 경우 실명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포도막염 증상이 나타나면 신속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력저하, 충혈, 눈부심이 심한 눈통증 등 결막염과 대표 증상이 비슷해 발견이 쉽지 않다. 어린이의 경우 성인보다 더욱 증상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적기에 치료 시 실명을 막을 수 있는 질환으로 전문 의료진에게 이른 진단과 조기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완치가 아니라 병의 진행과 재발을 막는 치료 전략이 필요하다. 과로를 피하고 규칙적인 운동과 충분한 수면으로 체력을 유지하면서 스트레스를 최소화해 면역체계를 유 지해야 한다. 글 이정윤·의학신문 기자(자료제공 전원생활)

인물

50세에 전설 속의 트로이를 찾아낸 하인리히 슐리만

지금으로부터 약 140년 전에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매혹되어 신화를 현실로 끌어올린 인물이 있다. 모두가 신화일 뿐이라고 했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준 책에서 읽은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현실로 발굴한 인물이 바로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힘든 현실에도 포기하지 않은 꿈 하인리히 슐리만은 독일의 메클렌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트로이 전쟁의 유적을 발견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목사였던 아버지가 사업에 돈을 투자했다 실패를 하면서 집안이 기울게 되었다. 슐리만은 10대부터 힘겨운 인생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그의 자서전인 〈고대에 대한 열정〉을 보면 어린 시절 일찍부터 경제적인 자립을 해야 했던 그가 얼마나 처절한 인생을 살고 있었는지를 잘 느낄 수 있다. 허름한 옷, 너덜너덜해진 구두,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허기지고 지친 표정으로 그는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 일자리를 부탁해야 했다. 우선은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활이 고달파도 책과 여행은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 덕분에 그는 삶과 노동을 통해서 무려 15개의 언어를 터득했다. 그가 열심히 노력한 것은 오직 하나의 목표, 8살 때부터 갖고 있었던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유적지를 발견하겠다는 어린 시절의 목표가 평생을 지배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꼽으라면 누구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꼽는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묘사한 그의 이야기는 슐리만의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저 신화 속 이야기에 불과했다. 50세의 나이에 트로이를 발굴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꿈을 갖는다. 때로는 어릴 적 하나의 꿈을 갖고 평생 동안 한 곳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겐 고난이 오히려 꿈을 향한 도전의 정당한 근거가 된다. 슐리만도 그랬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던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1854년에 영국과 러시아의 크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 전쟁에 쓰이는 물자는 어느 곳에서나 첫 번째 타격 목표가 된다. 그의 전 재산이 걸려 있던 배 한 척이 전운이 감도는 러시아의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영국군의 포격 때문에 항구에는 큰 불이 났다. 화물을 싣고 있던 대부분의 배들이 화재로 불타버렸다. 그러나 오직 한 척의 배만 무사했다. 바로 슐리만의 배였다.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항구에서 그만이 재산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으로 물자가 귀한 시기에 다른 선박들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슐리만의 배에 실려 있던 화물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큰 돈을 벌게 된 슐리만은 다음 인생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것은 바로 ‘트로이’였다. 푸른 빛이 감도는 에게 해와 사막처럼 황량한 벌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히사를리크 언덕 위에서 그는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하기 위해 땅을 파들어갔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이지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계속 발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 트로이의 흔적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날 땅속에서 무려 1,600점의 고대 그리스 유물들이 발굴됐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관은 그와 함께 바람과 먼지를 이겨냈던 아내의 머리에 씌워졌다. 트로이 유물이 발견되면서 트로이 전쟁이 사실로 밝혀졌다. 이제 슐리만은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지펴진 미케네 왕국의 발굴에도 나섰다.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조롱했다. 뜨거운 그리스의 태양 아래서 몇 달을 쉬지 않고 땅을 팠다. 그리고 결국 슐리만은 미케네 왕국도 발견했다. 바람과 모래가 뒤섞여 분간이 되지 않던 황량한 그리스의 황무지 언덕 위에서 그는 미케네의 성벽을 찾아냈다. 호메로스가 직접 눈으로 보고 기록을 남겼던 미케네의 사자문 위에서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기록이 맞았음을 증명해냈다. 미케네에서 그가 발굴한 유물과 유적들은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 역사를 또 한번 세상에 보여줬다. 간절한 꿈은 시련과 역경도 이겨낸다 트로이와 미케네에 이어 지중해의 섬 크레타에 존재했던 고대 크레타 왕국을 발굴하는 것이 그가 꿈꿨던 최종 목표였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달려드는 땅 주인들의 욕심 때문에 슐리만은 크레타의 발굴을 포기한다. 오랜 타지 생활로 몸이 쇠약해진 것도 또 다른 원인이었다. 훗날 슐리만이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영국의 고고학자 에반스는 크레타 왕국의 유적을 발굴해냈다. 슐리만의 예상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트로이와 미케네, 크레타의 발견은 콧대 높은 유럽중심주의에 파문을 던졌다.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아프리카에서 가까운 크레타 섬에서 시작된 문명이 그리스 본토로 이어졌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문명의 발전을 자신들만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유럽인들에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신화를 역사로 바꿔놓은 그의 발견 덕분에 문명이 발전했던 흐름과 순서에서 유럽이 제일 먼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인류의 문명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오랜 시간부터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과 우리가 예상했던 문명의 너머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슐리만 덕분이다. 그가 숨을 거두고 영면에 들어가는 순간, 그의 관 위에 누군가 정성스럽게 한 권의 책을 올려 놓았다. 바로 그가 어린 시절부터 꿈을 키웠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였다. 그가 평생 동안 마음 속에 간직했던 신화와 꿈으로 가득한 그 한 권의 책과 함께 슐리만은 영원히 땅속에 묻혔다. 간절한 꿈은 시간을 뛰어넘고, 시련과 역경조차도 비켜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슐리만은 세상에 일깨워 주었다. 글 김대근·NH농협은행 은퇴연구소 선임연구원

여행

바람은 노을 되어 – 안성맞춤 남사당 바우덕이축제

마을 높은 언덕배기에 남사당 기가 내걸렸다. 무리들은 마을사람들 보란 듯 한바탕 풍물을 쳐대고, 패거리 한 명이 어슬렁거리며 내려와 마을어른에게 놀이판을 청한다. 이윽고 허가가 떨어지면 의기양양 남사당 기를 앞세운 무리들은 길놀이를 펼치며 동네로 들어선다. 마을 한복판에 대여섯 장의 커다란 멍석이 깔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명나는 연희가 벌어진다. 놀이는 모두 여섯 마당이다. 풍물(농악), 버나(접시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로 숨 가쁘게 이어지고, 동리는 사람들의 환호로 가득한데 서쪽하늘로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남사당패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서민층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유랑연예집단이다. 원래 사당패는 여자들이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집단이었으나 조선 말기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생겨나면서 ‘남사당패’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중 안성 남사당이 가장 유명했다. 전국 3대 장(場)으로 알려진 안성장을 바탕으로 한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바우덕이라는 미모의 여성 꼭두쇠(우두머리)가 등장하면서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오죽하면 안성 남사당이 뜬다는 소문이 돌면 아이들이 하루 종일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노래를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바우덕이는 본명이 김암덕(金岩德)으로 1848년 안성에서 태어나 안성 남사당패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1870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다섯 살 때 청룡사 인근 불당골에 기거하던 남사당패에 맡겨진 후 줄타기, 살판 등의 남사당놀이를 익히게 된다. 당시 전국의 사찰들은 재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청룡사에서는 사당패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남사당패는 공연을 하면서 먹거리며 현금을 조달해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호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우덕이는 열다섯이 되던 해에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바우덕이의 신화가 완성된 것은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경복궁 공연이었다.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동원된 노역자들을 위로하고자 남사당패를 불러 공연을 펼치도록 했는데, 그때 바우덕이의 춤과 노래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모든 일꾼들이 넋을 잃고 빈 지게만 지고 왔다갔다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신들은 요망한 바우덕이를 처형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원군은 오히려 바우덕이의 기예를 칭찬하면서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했다. 이후 전국 어디든 바우덕이 사당패의 옥관자가 걸린 깃발이 등장하면 모든 사당패가 만장기를 숙여 예를 표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하지만 사당패거리를 패륜패속(悖倫敗俗)의 집단쯤으로 멸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직 나이 어린 처녀의 몸으로 40∼50명에 이르는 남사당들을 이끌고 전국을 떠도는 일은 인기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바우덕이는 조선 유일의 여성 꼭두쇠에 오른 후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며 악전고투하지만 마침내 길에서 병을 얻어 스물셋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바우덕이가 타계한 후 안성 남사당은 김복만, 원육덕, 이원보 등으로 그 계보가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거듭하다가 1982년 오함헌에 의해 ‘안성남사당풍물놀이보존회’로 재건되었다. 이후 안성시는 보존회와 함께 바우덕이풍물단을 만들고 보개면 복평리에 남사당전수관을 조성해 상설공연을 갖고 있으며, 해마다 가을이면 ‘바우덕이축제’를 열고 있기도 하다. 안성맞춤, 청룡사와 칠장사 불당골 바우덕이사당에는 서보원 작가의 바우덕이 동상 ‘바람은 노을 되어’가 서 있다. 내가 본 가장 사랑스러운 기념조형물이다. 예전의 안성장은 놋그릇·가죽신·종이신·담뱃대·갓·한지·북 같은 수공품에다 쌀·배·포도 같은 품질 좋은 농산물 집산지로서 숱한 물상객주가 몰려들어 도가를 차릴 정도였지만 지금은 영판 쇠락해서 여느 시골장터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품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7세기 중엽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칠장사는 11세기경 혜소국사가 7명의 악인을 제도하여 모두 도를 깨달았다는 고사에 따라 산 이름을 칠현산(七賢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칠현인이 오래 머문 절이라 하여 ‘칠장사(七長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안성남사당전수관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유명했던 안성 유기는 한때 20여 개 공방이 성업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사라져 현재는 4개 정도만 남아있다. ‘안성마춤유기공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유기장 보유자 김수영 장인이 아들 3명과 함께 전통 안성 유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다.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은 안성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안성맞춤이다. 매 2·7로 끝나는 날 서는 안성5일장은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지만 삼남지방의 온갖 물화가 모이던 옛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안성사람들의 자부심만은 여전하다. 한때 개성·수원과 더불어 ‘조선 3대 장’으로 꼽혔던 안성장은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보다 두 가지(써레와 모)가 더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 명성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 사람들은 장날이면 어김없이 장터로 몰려들어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도 북새통을 이룬다. ‘안성맞춤’은 안성 유기(鍮器, 놋그릇)에서 비롯되었다. 안성 유기가 다른 지방의 것보다 유명한 까닭은 서울 양반가들의 그릇을 도맡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안성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유기를 만들어 판매했는데 하나는 서민들이 사용하는 그릇으로 이것을 ‘장내기’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관청이나 양반가의 주문을 받아 특별히 품질과 모양을 좋게 만들었는데 바로 ‘모춤(맞춤)’이다. 안성 유기그릇은 제작기법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견고하고 광채가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까지 맞추어 내니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겨났다. 바우덕이의 몸과 마음을 거두어주던 청룡사는 고려 말 고승 나옹선사가 구름 속에 용이 노니는 것을 보고 이곳에 기거하면서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이 ‘서운산 청룡사’ 현판 밑으로 여염집 문간 들어가듯 하면 되는 것은 누구나 부담감 없이 들어오라는 뜻일 게다. 원래 문을 지켜야 할 금강역사들은 대웅전 건물 추녀 네 모서리에서 보 사이의 불상조각들을 옹위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청룡사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은 제멋대로 생긴 부드러운 곡선미의 대웅전 기둥들이다. 있는 대로 생긴 그대로의 모습이 넓은 추녀와 더불어 자연스럽고 친숙하다. 청룡사 깊숙이 불당골에는 바우덕이사당이 있다. 불당골은 예로부터 남사당패가 겨울을 나던 장소이다. 이곳 남사당패는 청룡사의 신표를 받아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이곳에 와서 월동을 했다고 한다. ‘바우덕이사당’이란 한글 현판이 붙은 사당은 그녀의 동상만이 홀로 지키며 남았고, 몸은 한참 떨어진 서운산 서쪽 자락에 묻혔다. 저자거리를 휘몰아 다니던 바람은 이제 고즈넉이 노을이 된 채로 안성 바우덕이 기행을 칠현산 산기슭에 위치한 칠장사에서 마무리하는 것 또한 안성맞춤인 일이다. 민중의 애환 속에서 태어난 ‘임꺽정’의 전설이 스며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당시 가장 천대를 받던 백정의 신분으로 수탈과 억압에 못 이기는 백성들을 규합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의적활동을 벌인다. 그가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까지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갖바치(가죽장인)가 머문 곳이 바로 칠장사다. 그래서 임꺽정은 안성 땅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갖바치가 칠장사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깁는 법을 가르쳤던 가죽신은 안성의 또 다른 특산물이 된다. 또한 칠장사는 ‘미륵세상’을 꿈꾸었던 궁예가 어린 시절 외눈으로 활쏘기를 하며 놀았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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