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건강

건강한 일상을 위한 의학 상식

건강 관련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에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제대로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일상에서 겪는 건강 관련 궁금중과 최신 의학 정보를 알아보자. 차태현 씨(가명)가 필자와 상담을 시작한 것은 7년 차 사법고시생일 때였다. 그는 이름난 대학교의 법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사법고시를 준비했는데, 항상 1차 시험은 합격해놓고 2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작문이 공포였던 차태현 씨에게 2차 논술시험은 그 자체가 무섭고 두려운 시간이었다. 필자는 차태현 씨에게 사법고시 도전을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가볍게 제안했다. 놀랍게도 차태현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쁘게 필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바로 사법고시 공부를 그만두었다. 얼마 후 차태현 씨 어머니가 상담실을 찾아왔다. 진작에 아들이 사법고시 공부를 관두게 했어야 하는데 질질 끌었다면서, 아들이 이제라도 포기하게 설득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아들이 7년이나 사법고시를 준비했고, 더구나 항상 2차 시험에서만 떨어졌기에 미련을 가질 법도 한데, 어머니 역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워했기에 필자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심장내과 - 기온 낮은 겨울철, 심장이 위험하다 발병 후 2시간 골든아워, 즉시 치료가 중요해 기온이 낮은 겨울이면 심근경색 발생 우려가 높아진다. 우리 몸은 찬 공기에 노출되면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고 말초동맥이 수축해 혈압이 오르는데, 이는 심근경색의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므로 활동이 적고 한파가 이어지는 겨울철에는 몸에서 보내오는 심장 신호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심장은 크게 3개의 심장혈관(관상동맥)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이 중 하나라도 급성으로 막히게 되면 심장에 전달되는 혈액이 줄어 심장 근육의 조직과 세포가 죽게 되는데 이를 심근경색증이라고 한다.대부분의 급성 심근경색증은 갑자기 발생하는 심한 흉통이 30분 이상 지속되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가슴의 중앙 부위 또는 약간 좌측에 발생하며, 누르는 듯한, 터질 듯한, 쪼개지는 듯한, 쥐어짜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통증이 양쪽 팔이나 턱 등으로 퍼져 나가기도 한다. 소화불량이나 명치 부위의 답답함, 오심, 구토, 속쓰림이 발생하는 경우 급성 체증이나 위장질환으로 단정하기 쉽지만, 심근경색이 이러한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드물게는 통증이 없이 호흡곤란, 가슴 불쾌감, 두통, 실신 등의 증상을 보이거나 거의 증상이 없을 수도 있다. 급성 심근경색증은 응급처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한 흉통이 생기면 우선 니트로글리세린을 혀 밑에 넣거나 입안에 스프레이를 뿌려야 하며, 통증이 가라앉지 않으면 4∼5분 간격으로 세 차례 투여할 수 있다. 통증이 지속되면 곧바로 전문병원의 응급실을 방문해야 한다. 심근경색은 위험한 질환이지만 발생 1∼2시간 내에 응급실에 도착해 증상 발생 후 5∼6시간 이내로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심장 근육이 영구적으로 괴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결국, 흉통이 발생하고 나서 얼마나 빨리 병원에 도착해 빠른 진단과 응급조치를 받느냐가 예후를 결정하는 주된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심근경색은 치료보다 예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심근경색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위험인자를 관리해야 한다. 즉, 음주·흡연·고혈압·고지혈증·비만증·당뇨병·운동결핍 등 심근경색을 일으킬 확률을 높이는 위험인자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채소와 과일, 등 푸른 생선 등이 심장에 좋은 음식이며, 음식을 짜게 먹지 않아야 한다. 튀긴 음식이나 패스트푸드도 좋지 않다. 운동은 꾸준하게 해야 한다. 운동 전 충분한 준비운동이 필요하며, 걷기나 수영, 자전거 타기 등 유산소운동을 일주일에 5일, 30분∼1시간 시행할 것을 추천한다. 소화기내과 - 숙취 없는 건강한 송년회 맞이하기 음주 후 3일 쉬어야… 안주는 고단백 음식으로 연말이 되면 음주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음식과 함께 곁들이는 한두 잔의 술은 혈액순환을 촉진시키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숙취는 간에서 알코올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대사물질 때문에 발생한다. 아세트알데히드는 ALDH(알코올 분해) 효소를 통해 분해되는데, 과음을 하게 될 경우 ALDH 효소가 부족해 미처 분해를 끝내지 못하고 체내에 축적돼 메스꺼움 등의 부작용을 일으킨다. 숙취는 급성 아세트알데히드 독성 중독 증상으로,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신경계·면역계 등 모든 내장 기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중에서도 간은 알코올을 분해하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므로 매우 큰 타격을 입는다. 특히 간염 바이러스를 보유했거나 만성 간질환을 앓고 있다면 자칫 간경변증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도 있다. 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음주는 일주일에 3회 이상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손상된 간세포가 회복되는 데 최소 3일이 걸리므로, 술을 마신 이후 3일간은 쉬어주어야 한다. 또 소주 1병의 알코올을 분해하는 데 평균 4시간 이상이 걸리므로 술은 천천히 마시는 것이 좋다. 음주 시 물을 충분히 마시거나 음주 전 간단한 식사를 하는 것도 좋다. 빈속에 술을 마시면 알코올 흡수가 빨라져 혈중 알코올 농도가 빨리 올라간다. 안주도 영향을 미치는데, 탕 요리나 튀김의 경우 짜거나 맵고 지나치게 기름져 오히려 간에 피로함을 더한다. 그보다는 치즈, 두부, 생선 등 고단백 음식을 섭취하거나 조개류 등 타우린 성분이 함유된 안주를 곁들이면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 피부과 - 자가용 출근족, 왼쪽 얼굴 노화 빠르다 출퇴근 시 자외선 차단제 꼼꼼히 발라야 평소 자가용 운전으로 출퇴근을 하는 50대 이상 15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왼쪽 얼굴이 오른쪽에 비해 햇빛으로 인한 손상을 많이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대 안암병원 피부과 연구팀은 얼굴 표면을 여러 부분으로 나눠 각 부분에 빛이 도달하는 양과 피부 광노화 정도를 평가했다. 연구 결과, 빛 에너지가 오른쪽보다 왼쪽에, 윗부분보다 아랫부분에 더 많이 도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왼쪽 관자놀이와 왼쪽 눈 아랫부분이 가장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왼쪽 얼굴이 오른쪽보다 색소침착이나 주름이 더 많이 발생했다. 출퇴근 시간에는 태양의 고도가 낮아 지표면에 도달하는 UVB(자외선B)가 적고, 상대적으로 UVA(자외선A)와 가시광선, 적외선이 많다. 일반적으로 출퇴근 시간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고 한낮에 비해 햇빛이 강하지 않다고 느껴 피부에 무해하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강하게 내리쬐는 자외선뿐만 아니라 파장이 길고 에너지가 약한 햇볕에 의해서도 피부가 손상을 입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자동차 유리창은 UVB와 UVA는 효과적으로 차단하지만 가시광선과 적외선 등 파장이 긴 광선에 대해서는 차단효과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여러 연구에서 가시광선과 적외선 또한 피부노화의 중요한 원인으로 보고되고 있는 만큼, 간과하기 쉬운 가시광선과 적외선에 의한 피부손상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운전하는 동안 태양광이 많이 도달하는 눈 아래와 코, 관자놀이, 턱 부분에 특히 꼼꼼히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 빛에 의한 만성적인 손상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 글 이정윤·의학신문 기자 (자료제공 전원생활)

여행

정조의나라 – 수원에서 화성까지, 정조대왕 능행차길을 따라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 동안 이루어진 정조(正祖, 1752~1800)의 화성행차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게 치러진 행사로, ‘새로운 조선’의 꿈을 담고 있는 장엄한 행진이기도 했다. 정조는 화성행차를 통해 자신의 효심을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개혁정치를 통한 새 국가 건설의 의지를 한껏 떨쳐 보였다. 비록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꿈으로 머물고 말았지만, ‘8일간의 행차’는 우리 역사상 가장 극적인 행행(行幸)으로 남아 아직 사라지지 않은 꿈들을 불러일으킨다. '저들의 추위가 나의 추위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한 정조는 거의 해마다 능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길에 나선다. 그 시기는 1월 혹은 2월로, 가급적 농사철을 피해 이루어졌다. 정조는 자신의 행차를 통해 민간에게 효행을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행차 중 여러 민원을 처리함으로써 백성과 함께하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두었다. 거기에 많은 인원의 이동에 따른 도로와 다리의 건설 보수로 치도(治道)를 겸하고, 대규모 병력을 데리고 가면서 수도방위체계를 점검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더욱이 1795년의 행차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는 나들이이기도 하고, 한창 건설 중인 화성을 둘러보고 독려하는 의미도 있었다. 224년 전 이루어진 정조의 화성행차를 따라가 보자. 윤2월 9일 새벽 일찍 창덕궁을 나선 행차는 숭례문을 거쳐 노량진으로 이어지며 장엄의 극치를 이룬다. 이때의 화성행차를 그림으로 기록한 에 의하면 이날 어가를 따라간 인원만도 1,779명에 달하고, 중도에 합류하거나 현지에 미리 가 있던 인원까지 합하면 실제 동원 인원은 6,000여명에 이른다. 노량진에서 행차는 배다리(舟橋)를 건넌다. 지금은 한강대교가 놓인 노들강변에 오방색 깃발이 나부끼는 배다리가 놓이고, 그 위로 1,700여명의 인원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강을 건너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한강을 건넌 행차는 시흥행궁에 이르고 거기서 첫날밤을 보낸다. 다음날 봄비 속에 화성행궁에 도착한 행차는 화성에서의 본격적인 행사를 준비한다. 셋째 날, 화성향교 대성전에 참배하고 문무과 별시를 시행한다. 넷째 날,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에 전배하고, 오후에는 화성에서 두 차례 군사훈련을 치른다. 다섯째 날, 이번 행차의 주 행사인 진찬례, 즉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벌어진다. 여섯째 날, 백성들을 위한 위무행사로 신풍루에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낙남헌에서는 노인들을 위한 잔치도 베푼다. 양로연을 마지막으로 화성에서의 주요 행사를 마친 정조는 자신이 설계한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일원을 돌며 감회를 새로이 한다. 일곱째 날, 화성을 떠난 행차는 내려온 길을 거슬러 귀경길에 오른다. 여덟째 날, 서울에 이르기 전 정조는 백성들을 가마 앞으로 불러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정조는 화성행차를 준비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민폐가 없도록 지시한다. 행차에 따른 경비도 국민의 세금과는 관계없이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수입으로 마련했다. 나아가 쓰고 남는 돈조차 온전히 백성과 나라를 위해 쓰도록 한다. 또한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품삯은 물론, 행사에 들어간 모든 비용을 수량과 단가까지 일일이 실명으로 기록토록 해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이는 일이 없게 했다. 개혁을 꿈꾸면서도 백성의 살림에도 소홀함이 없었던 정조의 애민정신은 화성 건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기록된 애민의 마음은 절절하기만 하다. 성벽을 쌓는 일로 말하자면 올해 쌓아도 될 일이고 내년에 쌓아도 될 일이고 10년을 걸려서 쌓아도 될 일이지만, 백성은 하루를 굶겨서도 안 되고 이틀을 굶겨서도 안 될 것이며 한 달을 참고 지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동지가 내일이라 추위가 심하다. 일하는 자들을 생각하니 저들의 추위가 나의 추위다. 솜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일일이 물어서 연유를 보고하라. 석수들에게 옷감과 모자를 보내주겠다. 원대한 국가경영의 꿈 지금에 이르러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은 성과 사람의 삶을 갈라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여느 성처럼 단지 마을을 둘러싸거나 격리된 공간으로 남아 있지 않고 무시로 사람의 삶과 섞이어든다. 때로 휴식과 조망의 장소로, 성 안팎 사람들의 산책로로, 아이들은 누각에 올라 공부를 하고, 하다못해 시장의 이름으로라도 구실을 한다. 하긴 성의 유래부터가 사도세자의 능원을 지금의 융릉으로 이전할 때,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읍치(邑治)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원주민들을 위한 신도시를 구상한 데서 비롯했다. 그 발단은 원대한 국가경영의 꿈으로까지 나아갔지만, 이제 수원화성 답사에 있어 굳이 코스를 짜가며 노역할 필요는 없다. 아무 곳에서나 시작해 갈 수 있는 데까지, 느긋하게 성곽을 따라가며 거닐고 둘러보면 된다. 조금이라도 성곽보다 높은 곳에 올라서면 거기 ‘정조의 나라’가 펼쳐진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낙남헌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이 사라지거나 심하게 훼손되었던 화성행궁은 1996년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됨으로써 서서히 그 면모를 되찾아가고 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잠시 머물거나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에 따라 별도의 궁궐을 마련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이장과 함께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을 축조하면서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했다. 그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융건릉과 용주사는 현재 화성시에 속한다. 융건릉은 장조(莊祖,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를 모신 ‘융릉(隆陵)’과,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健陵)’을 합친 능호다. 정조는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배봉산(拜峰山, 서울 휘경동) 기슭에 묻혀 있던 사도세자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했다. 그 뒤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했으며, 정조 역시 사후 효의왕후와 함께 그 곁에 묻혔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한 융건릉 숲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원산책길로 꼽히며, 이곳 노송에 눈이 쌓인 빼어난 경관은 ‘융건백설(隆健白雪)’이라 하여 화성팔경 중 제1경으로 부른다. 융건릉 인근의 용주사는 호란 때 소실되어 숲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정조가 다시 지어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는 원찰(願刹)로 삼았던 절이다.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이 있으며, 정조가 이 절을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發願), 주지인 보경을 시켜 제작한 이 있다. 대웅보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조가 용주사를 중창할 때 손수 심었다는 회양목은 한동안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노화와 수형(樹形) 훼 손으로 2002년 지정 해제되고 지금은 자취만 남아 있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인물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의 창업자이자,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였다. 일본 전국시대에 여러 영주들이 있었지만 결국 일본을 통일하고 평화를 가져온 사람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가 일본을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창업했을 때 나이는 61세였다. 인생 전반부는 위태로운 인질생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에 아카자키 성의 영주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이름은 다케치요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스루가의 이미가와 가문이라는 강대세력 사이에 끼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처지였다. 이에야스는 불과 2살 때 어머니와 헤어지는 불행을 겪는다. 어머니의 친정이 오다 가문과 손을 잡으면서 이미가와 가문에 눈치를 보던 아버지가 아내와 이혼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한 후, 6살이 되었을 때 이에야스에게 또 다른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아버지가 이미가와 가문의 보호를 받기로 결정하면서 이에야스가 이미가와 가문에 인질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질로 가던 중 납치되어 이미가와 가문과 적대적이던 오다 가문에게로 보내졌다. 오다 가문에서 2년간 인질생활을 하면서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오다 가문에서 인질생활을 한 지 2년 만에 이에야스는 다시 이미가와 가문의 인질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에야스의 아버지는 가신에게 암살당했다. 이에야스는 8세부터 19세까지 이미가와 가문에서 인질생활을 하며, 이미가와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키워졌다. 인질생활을 하던 이에야스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가 찾아온다. 이미가와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영주가 죽으면서 인질생활에서 벗어난 것이다.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주가 된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 세력을 대부분 흡수한 히데요시와 정면으로 싸울 경우 불리해질 입장을 고려한 것이었다. 61세의 나이에 에도 막부를 열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당시 중심지였던 교토에서 먼 동쪽의 낯선 땅인 에도(현재 도쿄)를 영지로 내렸다. 사실상 중앙 정치무대에서 내쫓긴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처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쪽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당시 늪지대였던 에도를 개간하고, 상인들을 불러 모아 어엿한 성으로 발전시켰다. 이에야스는 일본의 패권을 차지한 뒤에도 교토 인근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막부를 열어 지역의 발전을 꾀했고, 특히 에도 지역의 개발을 통해 훗날 도쿄 탄생의 초석을 놓았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각 지역의 영주들을 전쟁터로 내몰 때에도 아직 영지의 혼란이 수습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유일하게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 군사력을 비축했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에 사망하고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다시금 중앙의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영주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당시 실질적으로 가장 큰 힘을 가졌던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출정했던 영주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아래에 두어 그 힘을 더욱 키워나갔다. 그리고 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지하던 영주들을 격파하면서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고, 이 승전으로 에도 막부가 열리는 기초가 다져졌다. 1603년 2월 천황으로부터 막부 설립을 허가 받은 이에야스는 쇼군의 자리에 올라 마침내 에도 막부를 열었다. 그리고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1615년에 제거함으로써 마침내 평화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평화는 그의 자손들이 250년간 막부의 쇼군 자리에 오르며 유지되었다. 나이 들어도 인내할 수 있다면 ‘차가운 돌에도 3년’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차가운 돌 위에서 3년이란 세월을 앉아 있을 정도로 참고 견디면 결국 돌도 따뜻해진다는 뜻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도 참고 견디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비유를 담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바로 이 속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다. 8살 때부터 다른 가문의 인질로 가고, 다른 유력 영주들의 부당한 명령도 참고 견디며 힘을 기른 그의 참을성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사당인 도쇼구의 마구간 건물에는 산자루(三猿)라는 유명한 조각이 있다.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세 마리의 원숭이가 새겨진 것인데, 이것은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않으면서 견디는 인내의 처세술을 가르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고난이 가득했고 죽을 위기에 자주 직면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상을 사는 방법이 바로 인내였음을 다시금 일깨우는 조각상이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 가질 이유도 없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으로 널리 회자되는 말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조급해지는 경향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과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더욱 조급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나이가 들어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이 목표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차근차근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는 방식을 선호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참을성이 떨어지고, 열정이 식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편견에 불과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외에도 나이가 들어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많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도 자신이 목표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인내하고,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글 김대근·NH농협은행 은퇴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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