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정조의나라 – 수원에서 화성까지, 정조대왕 능행차길을 따라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 동안 이루어진 정조(正祖, 1752~1800)의 화성행차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게 치러진 행사로, ‘새로운 조선’의 꿈을 담고 있는 장엄한 행진이기도 했다. 정조는 화성행차를 통해 자신의 효심을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개혁정치를 통한 새 국가 건설의 의지를 한껏 떨쳐 보였다. 비록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꿈으로 머물고 말았지만, ‘8일간의 행차’는 우리 역사상 가장 극적인 행행(行幸)으로 남아 아직 사라지지 않은 꿈들을 불러일으킨다.
'저들의 추위가 나의 추위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한 정조는 거의 해마다 능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길에 나선다. 그 시기는 1월 혹은 2월로, 가급적 농사철을 피해 이루어졌다. 정조는 자신의 행차를 통해 민간에게 효행을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행차 중 여러 민원을 처리함으로써 백성과 함께하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두었다. 거기에 많은 인원의 이동에 따른 도로와 다리의 건설 보수로 치도(治道)를 겸하고, 대규모 병력을 데리고 가면서 수도방위체계를 점검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더욱이 1795년의 행차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는 나들이이기도 하고, 한창 건설 중인 화성을 둘러보고 독려하는 의미도 있었다.
224년 전 이루어진 정조의 화성행차를 따라가 보자. 윤2월 9일 새벽 일찍 창덕궁을 나선 행차는 숭례문을 거쳐 노량진으로 이어지며 장엄의 극치를 이룬다. 이때의 화성행차를 그림으로 기록한 에 의하면 이날 어가를 따라간 인원만도 1,779명에 달하고, 중도에 합류하거나 현지에 미리 가 있던 인원까지 합하면 실제 동원 인원은 6,000여명에 이른다. 노량진에서 행차는 배다리(舟橋)를 건넌다. 지금은 한강대교가 놓인 노들강변에 오방색 깃발이 나부끼는 배다리가 놓이고, 그 위로 1,700여명의 인원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강을 건너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한강을 건넌 행차는 시흥행궁에 이르고 거기서 첫날밤을 보낸다.
다음날 봄비 속에 화성행궁에 도착한 행차는 화성에서의 본격적인 행사를 준비한다. 셋째 날, 화성향교 대성전에 참배하고 문무과 별시를 시행한다. 넷째 날,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에 전배하고, 오후에는 화성에서 두 차례 군사훈련을 치른다. 다섯째 날, 이번 행차의 주 행사인 진찬례, 즉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벌어진다. 여섯째 날, 백성들을 위한 위무행사로 신풍루에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낙남헌에서는 노인들을 위한 잔치도 베푼다. 양로연을 마지막으로 화성에서의 주요 행사를 마친 정조는 자신이 설계한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일원을 돌며 감회를 새로이 한다. 일곱째 날, 화성을 떠난 행차는 내려온 길을 거슬러 귀경길에 오른다. 여덟째 날, 서울에 이르기 전 정조는 백성들을 가마 앞으로 불러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정조는 화성행차를 준비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민폐가 없도록 지시한다. 행차에 따른 경비도 국민의 세금과는 관계없이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수입으로 마련했다. 나아가 쓰고 남는 돈조차 온전히 백성과 나라를 위해 쓰도록 한다. 또한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품삯은 물론, 행사에 들어간 모든 비용을 수량과 단가까지 일일이 실명으로 기록토록 해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이는 일이 없게 했다. 개혁을 꿈꾸면서도 백성의 살림에도 소홀함이 없었던 정조의 애민정신은 화성 건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기록된 애민의 마음은 절절하기만 하다. 성벽을 쌓는 일로 말하자면 올해 쌓아도 될 일이고 내년에 쌓아도 될 일이고 10년을 걸려서 쌓아도 될 일이지만, 백성은 하루를 굶겨서도 안 되고 이틀을 굶겨서도 안 될 것이며 한 달을 참고 지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동지가 내일이라 추위가 심하다. 일하는 자들을 생각하니 저들의 추위가 나의 추위다. 솜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일일이 물어서 연유를 보고하라. 석수들에게 옷감과 모자를 보내주겠다.
원대한 국가경영의 꿈
지금에 이르러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은 성과 사람의 삶을 갈라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여느 성처럼 단지 마을을 둘러싸거나 격리된 공간으로 남아 있지 않고 무시로 사람의 삶과 섞이어든다. 때로 휴식과 조망의 장소로, 성 안팎 사람들의 산책로로, 아이들은 누각에 올라 공부를 하고, 하다못해 시장의 이름으로라도 구실을 한다. 하긴 성의 유래부터가 사도세자의 능원을 지금의 융릉으로 이전할 때,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읍치(邑治)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원주민들을 위한 신도시를 구상한 데서 비롯했다. 그 발단은 원대한 국가경영의 꿈으로까지 나아갔지만, 이제 수원화성 답사에 있어 굳이 코스를 짜가며 노역할 필요는 없다. 아무 곳에서나 시작해 갈 수 있는 데까지, 느긋하게 성곽을 따라가며 거닐고 둘러보면 된다. 조금이라도 성곽보다 높은 곳에 올라서면 거기 ‘정조의 나라’가 펼쳐진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낙남헌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이 사라지거나 심하게 훼손되었던 화성행궁은 1996년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됨으로써 서서히 그 면모를 되찾아가고 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잠시 머물거나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에 따라 별도의 궁궐을 마련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이장과 함께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을 축조하면서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했다. 그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융건릉과 용주사는 현재 화성시에 속한다. 융건릉은 장조(莊祖,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를 모신 ‘융릉(隆陵)’과,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健陵)’을 합친 능호다. 정조는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배봉산(拜峰山, 서울 휘경동) 기슭에 묻혀 있던 사도세자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했다. 그 뒤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했으며, 정조 역시 사후 효의왕후와 함께 그 곁에 묻혔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한 융건릉 숲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원산책길로 꼽히며, 이곳 노송에 눈이 쌓인 빼어난 경관은 ‘융건백설(隆健白雪)’이라 하여 화성팔경 중 제1경으로 부른다.
융건릉 인근의 용주사는 호란 때 소실되어 숲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정조가 다시 지어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는 원찰(願刹)로 삼았던 절이다.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이 있으며, 정조가 이 절을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發願), 주지인 보경을 시켜 제작한 이 있다. 대웅보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조가 용주사를 중창할 때 손수 심었다는 회양목은 한동안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노화와 수형(樹形) 훼 손으로 2002년 지정 해제되고 지금은 자취만 남아 있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