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건강

건강한 일상을 위한 의학 상식

건강 관련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에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제대로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일상에서 겪는 건강 관련 궁금증과 최신 의학 정보를 알아보자. 정형외과 봄, 당신의 무릎을 깨우세요 봄이 오면 야외활동에 나서는 사람이 늘어난다. 하지만 겨우내 활동량이 줄어든 우리 몸은 근육이 움츠러들고 혈관이 수축된 상태다. 경직된 근육을 충분히 풀어주지 않고 움직였다간 관절과 근육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운동으로 인한 무릎 손상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반월연골판 파열을 들 수 있다. 반월연골판은 허벅지뼈와 정강이뼈 사이 안팎에 있는 연골판으로,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등산이나 나들이 등 야외활동 후에 무릎이 붓고 잘 펴지지 않거나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면 반월연골판 파열을 의심해야 한다. 반월연골판 파열 증상이 경미하다면 약물치료나 물리치료, 운동치료 등 무릎 기능을 개선하기 위한 보존적 치료를 시행한다. 하지만 3~4개월 이상 치료했음에도 호전되지 않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해볼 수 있다. 무릎관절 속에는 전방십자인대와 후방십자인대 등 두 개의 인대가 십자(十) 형태로 엇갈려 있다. 십자인대는 허벅지뼈와 정강이뼈를 잡아줘 무릎관절이 앞뒤로 과하게 흔들리지 않게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농구·축구·배드민턴과 같은 운동 중에 파열되는 경우가 많다.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갑자기 속도를 늦춰 멈추거나 급작스럽게 방향을 바꿀 때, 무릎관절이 뒤틀리면서 과도한 충격과 회전력을 받아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될 수 있다. 십자인대가 파열되면 ‘퍽’ 또는 ‘뚝’ 하는 파열음과 함께 무릎관절 안에 피가 고여 손상 부위가 붓고 통증이 발생한다. 부상 직후에는 무릎을 잘 구부릴 수가 없고 발을 딛기가 어렵다. 며칠이 지나면 부기가 가라앉고 통증이 줄어들기 때문에 타박상으로 오인해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십자인대 파열을 방치하면 활동 시 무릎관절이 자주 어긋나는 느낌을 받고 통증 때문에 생활이 불편해질 수 있다. 운동 중 무릎 손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스트레칭으로 경직된 관절과 근육을 충분히 풀어주고 운동 후에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평소에는 다리 근육을 강화시켜주는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집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효과적인 운동은 ‘하프 스쿼트(half squat)’라는 운동이다. 양발을 어깨 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30~40도 구부린 다음 10~15초 가량 자세를 멈춰 유지한다. 이러한 동작을 10회씩 적당한 휴식과 함께 3번 반복한다. 자세 유지가 어려운 사람은 벽에 기대어 하면 도움이 된다. 아침저녁으로 10분씩 시간을 내어 스트레칭과 근육강화 운동을 규칙적으로 실시해 건강한 무릎관절을 지키자. 호흡기내과 나도 모르게 쏟아지는 잠 ‘춘곤증’ 충분히 잠을 자도 오후만 되면 졸음이 쏟아지고, 식욕까지 떨어지는 ‘춘곤증’은 봄에 찾아오는 불청객 중 하나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변하면서 갑작스레 신진대사가 활발해지는 시기에 나타나는 질환으로 봄철피로증후군으로 불린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무엇보다 생체리듬의 변화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봄이 되어 일조량이 늘고 기온이 오르면, 겨울 기후에 적응했던 피부와 근육이 따뜻한 기온에 맞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수면 및 일상생활 패턴이 변하면서 생체리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춘곤증이 나타나는 것이다. 대표적인 증상으로 피로·졸음·식욕부진·소화불량·현기증이 있다. 이러한 증상은 신체리듬을 회복하는 데 에너지를 쏟게 되면서 신체 적응능력이 떨어지면서 나타난다.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6개월 이상 지속된다면 만성피로증후군 등 다른 질환을 의심해볼 수 있다. 춘곤증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겨울 동안 규칙적인 운동, 고른 영양섭취, 균형 잡힌 생활습관으로 체력을 보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음주와 흡연, 카페인 섭취를 자제해야 하며 특히 스트레스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 밤에 잠을 설치거나 코골이가 심한 경우 낮에 토막잠을 자는 것이 좋다. 또한 강도 높은 운동보다는 스트레칭이나 간단한 맨손체조, 가벼운 산책이 도움이 된다. 피부과 손거스러미 함부로 뜯지 마세요 찬바람이 불어 피부가 건조해지면 손톱 주변의 살갗이 가시처럼 얇게 터져 일어나는 경우가 흔히 나타난다. 이를 ‘거스러미’라고 하는데, 무심코 뜯어냈다가 고름이 차고 열감이 심해지는 ‘조갑주위염’에 걸릴 수 있다. 생인손이라고도 불리는 조갑주위염은 손톱이나 발톱 주변에 염증이 생기는 질환을 말한다. 흔히 손발톱 거스러미가 뜯겨진 틈 사이로 균이 들어가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열이 나면서 고름이 차는 증상이다.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거나 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에 불편을 줄 수 있어 평소 관리가 필요하다. 먼저 조갑주위염을 예방하려면 거스러미가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거스러미는 피부가 건조할 때 생기므로 손톱 주변을 청결히 하고, 촉촉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습을 위해 핸드로션 등을 손톱까지 수시로 발라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손발톱을 너무 짧게 깎아 상처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설거지를 할 때는 반드시 장갑을 착용해야 하며 매니큐어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거스러미가 생겼을 때는 이나 손톱으로 뜯지 않도록 한다. 만약 거스러미를 정리하고 싶다면 손톱깎이나 작은 가위로 짧지 않게 잘라내야 한다. 너무 짧게 잘라 상처가 나면 그 틈으로 균이 침입할 수 있다. 조갑주위염은 대부분 자연적으로 치유되지만 간혹 감염이 심해져 손발톱이 빠지기도 한다. 또한 봉와직염으로 악화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부기가 심하다면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아야 한다. 글 이정윤·의학신문 기자 (자료제공 전원생활)

인물

46세에 과거를 급제한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전란은 임진왜란이었다. 왜란 초기 한양이 한 달 만에 왜군에게 함락될 정도로 패배를 거듭하던 조선군의 전황을 바꾼 전투는 행주대첩이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에서 3만 왜군의 공격을 막아낸 지휘관은 바로 권율이었다. 46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 합격 권율은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낼 정도로 가문도 좋고 똑똑했지만 특이하게도 권율은 40세가 되도록 관직을 얻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이를 걱정하자, 권율은 “옛날 강태공은 나이 80에 벼슬에 올라 오히려 천하를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했는데, 아직 내 나이가 강태공의 반밖에 안되며 능력까지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출세가 늦은 것을 걱정하겠는가?”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선비들처럼 방에 틀어박혀서 글공부만 한 것도 아니고, 지인들과 어울려 전국을 여행하거나 지리를 연구하는 등 한량처럼 지냈다. 권율이 뒤늦게 벼슬에 뜻을 두게 된 이유는 아버지 권철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 권철은 죽기 직전에 막내 아들 권율을 빤히 쳐다보다가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이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 46세였던 158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성적도 상위가 아니라 중후위에 걸쳐 있는 병과(丙科, 11~33등)였다. 그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서북 지역의 최변방인 의주 목사로 부임했지만 이듬해에 해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관직을 떠나 있었다. 전쟁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권율의 능력과 인품을 듣고 전라도 광주 목사에 임명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은 개전 한 달 만에 한양을 점거하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해 나갔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반격으로 인해 보급로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 왜군은 곡창 지대인 전라도로 군대를 보내 그곳을 점거하고 병참 기지화할 계획을 세웠다.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왜군의 병력은 2만명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권율은 고작 1500명의 병력으로 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충청남도 금산의 이치고개로 진군하여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전투 중 다른 장군이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왜군이 이 틈을 노려 조선군이 설치한 목책을 부수고 쳐들어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권율은 병사들을 격려하고, 완강히 저항하여 왜군을 격퇴했다. 이치전투의 승리는 이순신의 해전과 함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보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승전의 공로로 권율은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했다.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권율은 도성 수복을 위해 전진했다. 그가 선택한 거점은 행주산성이었다. 고작 3천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에 주둔한 권율이 신경 쓰였던 왜군은 1593년 2월 12일에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왜군은 7개 부대로 나누어 진격했는데, 권율은 7개 부대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조선군과 백성들은 권율의 지휘로 합심하여 행주산성을 지켰는데, 무기가 떨어진 조선군은 전투 막바지에 투석전을 펼쳤다. 이때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짧게 잘라 거기에 돌을 운반해 전투를 도왔다고 한다. 조선군은 격전 끝에 승리했고,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은 조선의 중요한 장수로 떠오르게 된다. 행주산성의 승리는 조선의 한양 수복에 큰 공을 세운 전투였다. 행주대첩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4월 18일 왜군이 한양에서 후퇴하며 조선군은 1년 만에 도성을 탈환했다. 나이가 많아도 포기하지 않고 뜻을 이루다 행주대첩 이후 권율은 한양 수복의 공으로 조선군의 지휘를 총괄하는 도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왜군을 경상도에서 격퇴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군을 지휘했다. 왜란이 끝나자 권율은 전란 중에 기력을 소진한 탓인지 곧 사퇴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고, 이듬해인 1599년에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임진왜란의 영웅이었던 권율은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 선무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다. 큰 그릇을 만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큰 인물도 오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 바로 권율이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조선시대에 46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아들뻘 나이의 동기들 속에서 쉽지 않은 벼슬생활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큰 위기가 발생하자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지금도 늦은 나이라고 할 수 있는 55세부터 권율은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 일생 동안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했던 권율을 통해서 우리는 ‘나이가 많아서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늦었다’는 말이 근거가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이룰 것이 더 많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점점 더 흥미로운 대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권율은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무장으로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지 않았다. 60세에 가까운 나이에 이순신이 보낸 화포의 활용방안을 연구하여 행주대첩에서 활용하였을 정도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활기차고 흥미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이다. 이성의 역할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 활동을 중단하면 인간은 인간다운 생명의 끈을 스스로 끊어버리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이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진정한 노년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글 김대근·NH농협은행 은퇴연구소 선임연구원

여행

섬진강학교 –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시인’이 여는 섬진강학교 섬진강에 봄이 왔다. 겨우내 산골짜기에 묶여 있던 물들이 나지막이 흐르며 잠든 가지 끝에 봄기운을 한껏 밀어 올리고, 이윽고 온갖 꽃들은 개화를 준비한다. 매화꽃을 시작으로 머지않아 산수유에 벚꽃까지, 봄 내내 피고 지는 꽃들로 몸살을 앓을 구례·하동의 하류와는 달리 임실·순창의 상류는 고즈넉함 속에 순정한 물빛으로 이미 생기롭다. 더욱이 그곳에는 굽이를 따라 펼쳐지는 강마을의 서정이 그윽하나니. 봄이 오는 섬진강에 학교가 열린다. 교장은 당연히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다. 섬진강학교는 4월 27일, 인문학습원 현장강의로 ‘시인과 함께 걷는 섬진강’을 실시한다. 섬진강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천담-구담마을 약 7km의 비경을 3시간 30분 동안 여유롭게 걷는다. 시인은 이날 섬진강을 천천히 함께 걸으며 아름다운 강과 산, 문학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섬진강학교를 앞두고 시인을 찾아간 날, 시인은 아내와 함께 집 안팎으로 봄맞이 준비에 부산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그을린 얼굴은 여느 농부와 다를 바 없었지만, 나름 패셔너블한 복장만큼은 꽃등보다 더 화사하다. 그러고 보니 시인의 집도 많이 바뀌었다. 큰길가로 ‘시인의 집’이라는 군에서 만들어준 간판이 서고, ‘마루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는 ‘관란헌(觀瀾軒)’이란 옥호도 ‘회문재(回文齋)’로 바뀌어 걸려 있다. 평생 회문산을 바라보며 살아온 시인의 뜻이 담긴 것이겠지만, 2016년 봄 8년간의 ‘전주 살이’를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이기에 남다른 의미가 읽힌다. 시인은 섬진강가 작은 마을인 이곳 진메에서 태어나 덕치초등학교를 나왔고, 모교에서 38년 동안 교사를 하다 2008년 퇴임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며 그 작은 마을의 이야기들을 모아 시와 산문을 쓰며 살고 있다. 1982년 에서 나온 시집에 연작시 ‘섬진강’ 등 8편이 실리며 등단했고, 시집 으로 널리 알려져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다가 이제는 ‘섬진강학교’ 교장까지 자임하고 있으니, 섬진강은 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실핏줄과도 같은 것이다. 섬진강학교 미리보기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에서 순창군 적성면까지 강길은 좁은 협곡에 굽이가 많고, 때 묻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촌스러움을 간직한 마을이 산자락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시인은 1990년부터 2년에 걸쳐 진메에서 천담까지 강길을 50여 분을 걸어 출퇴근했다. 아침마다 10리를 걸어 다니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에겐 출퇴근하며 걷던 그 강변의 10리 길이야말로 ‘천국의 길’이었다. 시인은 “그 강길 10리를 오간 2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진메마을에서 장천계곡으로 바삐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한 시간쯤 걸어 내려가면 툭 터진 천담마을에 이른다. 강물이 다시 굽이도는 곳에 서면 용골산이 보이는데, 빨치산이 기거했던 산이다. 천담에서 돌무덤, 선돌, 느티나무를 둘러보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 이것저것 살림살이들을 구경하며 우리네 쓸데없이 많기만 한 살림도구들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다. 거기서 발길을 돌려 차근차근 산과 물을 눈요기하며 걷다 보면 길은 어느새 구담마을에 이른다. 구담마을은 섬진강가 3개 마을 중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마을일 것이다. 특히 봄이면 매화꽃이 만개해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된다. 더욱이 이곳은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비록 괴롭고 아픈 시절이었다 해도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모든 추억은 아름답고, 모든 사람에게 추억이 있어 구담마을은 여전히 아름다운지 모른다. 구담에서 징검다리를 건너면 그곳에 또 아름답고 웅장한 계곡이 펼쳐진다. 순창군 동계면 이치리를 흐르는 장구목(장군목)이다. 거센 물살이 빚어놓은 기묘한 바위들이 약 3km에 걸쳐 드러나는데, 그중 압권은 ‘요강바위’다. 요강처럼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가로 2.7m, 세로 4m, 깊이 2m로 무게가 무려 15t에 이른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 다섯 명이 토벌대를 피해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바위에 들어가 지성을 들이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장구목에서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적성강’으로 불린다. 그리고 적성면의 한 매운탕집에서 늦은 식사 겸 뒤풀이로 학교는 마침내 파한다. 섬진강학교에 참가하고 싶으면 인문학습원 홈페이지(www.huschool.com)에서 ‘학교소개-섬진강학교’를 찾으면 된다. 꼭 학교가 아니라 하더라도 섬진강 상류 강마을 여행은 ‘학교길’을 따르면 좋다. 때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꽃이 피기 전이나 꽃이 진 이후라도 눈을 감고 그 길을 그려볼 수 있으리라. 십 수 년 전 처음 이곳을 찾은 이래 올 때마다 사라지는 것들로 해서 가슴이 내려앉는 나는 이제 아예 눈을 감고 그리는 법을 익혔다. 글 유성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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