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섬진강학교 –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시인’이 여는 섬진강학교
섬진강에 봄이 왔다. 겨우내 산골짜기에 묶여 있던 물들이 나지막이 흐르며 잠든 가지 끝에 봄기운을 한껏 밀어 올리고, 이윽고 온갖 꽃들은 개화를 준비한다. 매화꽃을 시작으로 머지않아 산수유에 벚꽃까지, 봄 내내 피고 지는 꽃들로 몸살을 앓을 구례·하동의 하류와는 달리 임실·순창의 상류는 고즈넉함 속에 순정한 물빛으로 이미 생기롭다. 더욱이 그곳에는 굽이를 따라 펼쳐지는 강마을의 서정이 그윽하나니.
봄이 오는 섬진강에 학교가 열린다. 교장은 당연히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다. 섬진강학교는 4월 27일, 인문학습원 현장강의로 ‘시인과 함께 걷는 섬진강’을 실시한다. 섬진강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천담-구담마을 약 7km의 비경을 3시간 30분 동안 여유롭게 걷는다. 시인은 이날 섬진강을 천천히 함께 걸으며 아름다운 강과 산, 문학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섬진강학교를 앞두고 시인을 찾아간 날, 시인은 아내와 함께 집 안팎으로 봄맞이 준비에 부산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그을린 얼굴은 여느 농부와 다를 바 없었지만, 나름 패셔너블한 복장만큼은 꽃등보다 더 화사하다. 그러고 보니 시인의 집도 많이 바뀌었다. 큰길가로 ‘시인의 집’이라는 군에서 만들어준 간판이 서고, ‘마루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는 ‘관란헌(觀瀾軒)’이란 옥호도 ‘회문재(回文齋)’로 바뀌어 걸려 있다. 평생 회문산을 바라보며 살아온 시인의 뜻이 담긴 것이겠지만, 2016년 봄 8년간의 ‘전주 살이’를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이기에 남다른 의미가 읽힌다.
시인은 섬진강가 작은 마을인 이곳 진메에서 태어나 덕치초등학교를 나왔고, 모교에서 38년 동안 교사를 하다 2008년 퇴임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며 그 작은 마을의 이야기들을 모아 시와 산문을 쓰며 살고 있다. 1982년 에서 나온 시집에 연작시 ‘섬진강’ 등 8편이 실리며 등단했고, 시집 으로 널리 알려져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다가 이제는 ‘섬진강학교’ 교장까지 자임하고 있으니, 섬진강은 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실핏줄과도 같은 것이다.
섬진강학교 미리보기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에서 순창군 적성면까지 강길은 좁은 협곡에 굽이가 많고, 때 묻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촌스러움을 간직한 마을이 산자락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시인은 1990년부터 2년에 걸쳐 진메에서 천담까지 강길을 50여 분을 걸어 출퇴근했다. 아침마다 10리를 걸어 다니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에겐 출퇴근하며 걷던 그 강변의 10리 길이야말로 ‘천국의 길’이었다. 시인은 “그 강길 10리를 오간 2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진메마을에서 장천계곡으로 바삐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한 시간쯤 걸어 내려가면 툭 터진 천담마을에 이른다. 강물이 다시 굽이도는 곳에 서면 용골산이 보이는데, 빨치산이 기거했던 산이다. 천담에서 돌무덤, 선돌, 느티나무를 둘러보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 이것저것 살림살이들을 구경하며 우리네 쓸데없이 많기만 한 살림도구들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다.
거기서 발길을 돌려 차근차근 산과 물을 눈요기하며 걷다 보면 길은 어느새 구담마을에 이른다. 구담마을은 섬진강가 3개 마을 중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마을일 것이다. 특히 봄이면 매화꽃이 만개해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된다. 더욱이 이곳은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비록 괴롭고 아픈 시절이었다 해도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모든 추억은 아름답고, 모든 사람에게 추억이 있어 구담마을은 여전히 아름다운지 모른다.
구담에서 징검다리를 건너면 그곳에 또 아름답고 웅장한 계곡이 펼쳐진다. 순창군 동계면 이치리를 흐르는 장구목(장군목)이다. 거센 물살이 빚어놓은 기묘한 바위들이 약 3km에 걸쳐 드러나는데, 그중 압권은 ‘요강바위’다. 요강처럼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가로 2.7m, 세로 4m, 깊이 2m로 무게가 무려 15t에 이른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 다섯 명이 토벌대를 피해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바위에 들어가 지성을 들이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장구목에서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적성강’으로 불린다. 그리고 적성면의 한 매운탕집에서 늦은 식사 겸 뒤풀이로 학교는 마침내 파한다. 섬진강학교에 참가하고 싶으면 인문학습원 홈페이지(www.huschool.com)에서 ‘학교소개-섬진강학교’를 찾으면 된다. 꼭 학교가 아니라 하더라도 섬진강 상류 강마을 여행은 ‘학교길’을 따르면 좋다. 때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꽃이 피기 전이나 꽃이 진 이후라도 눈을 감고 그 길을 그려볼 수 있으리라. 십 수 년 전 처음 이곳을 찾은 이래 올 때마다 사라지는 것들로 해서 가슴이 내려앉는 나는 이제 아예 눈을 감고 그리는 법을 익혔다.
글 유성문·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