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건강

건강한 일상을 위한 의학 상식

건강 관련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에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제대로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일상에서 겪는 건강 관련 궁금증과 최신 의학 정보를 알아보자. 정신건강의학과 빈속 음주 금물,주량에 따라 절제해야 2016년 보건복지부의 정신질환 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알코올 의존증 환자는 139만명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성인 가운데 10명 중 1명은 살면서 한 번 이상 알코올의존증을 경험한다. 알코올 의존증에 걸리면 우선 신체적으로 금단현상이 나타난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때 식은땀이 나고, 손·눈꺼풀 등이 떨리거나, 심리적으로는 불안함과 초조함을 느끼고 우울감 등 부정적인 감정에 빠질 확률이 높다.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필름이 자주 끊길 때, 과음 후 다음 날 해장술을 마신다면 알코올 의존증을 의심해야 한다. 알코올 의존증은 정신적·신체적으로 다양한 합병증을 동반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울증과 불안장애다. 술을 마시면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분비돼 기분이 좋아지는데, 음주가 반복되면 이전만큼 세로토닌과 도파민을 분비하려고 더 많은 알코올을 찾게 되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우울한 기분을 느끼기 쉽고 술 이외의 것에 대해 흥미가 떨어지게 된다. 알코올성 치매의 위험성 또한 증가한다. 알코올은 혈액의 흐름을 빠르게 만들고 뇌혈관을 팽창시키며 뇌압을 상승시킨다. 이로 인해 체내 산소가 부족해지고, 두통이 생기고, 나아가 뇌세포가 파괴된다. 과도한 음주는 뇌 인지영역을 손상시키기도 한다. 이로 인해 기억력이 감퇴하며, 증상이 심해지면 알코올성 치매로 이어진다. 우리 몸에 들어오는 알코올은 간에서 생성된 분해효소에 의해 아세트알데하이드라는 독성 화학물질로 바뀐다. 술을 마시면 알딸딸하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바로 이 아세트알데하이드라는 물질 때문이다. 이 물질은 알코올보다 최대 30배 강한 독성을 가지며, 숙취·근육통·구토 등의 증상을 유발하고 부정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알코올을 분해하는 간에도 악영향을 미치는데, 과도한 음주로 손상된 간세포는 재생되지 못하고 간염·간경변증 등으로 진행될 수 있다. 과음을 권장하는 음주문화는 성인들이 쉽게 알코올 의존증에 걸리는 원인 중 하나다. 음주 금단현상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도 많다. 알코올 의존증에 빠지면 나 자신의 건강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건강한 음주습관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빈속에 술을 마시면 알코올 흡수 속도가 빨라져 금방 취한다. 간과 위장에도 좋지 않다. 술자리가 있다면 미리 식사를 든든히 하고 기름진 음식을 피해야 한다. 물은 채내 알코올 농도를 낮추고, 흡수율을 떨어뜨리며, 활발한 이뇨작용으로 알코올을 체내에서 배출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본인의 주량에 따라 절제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산부인과 나도 모르게 쏟아지는 잠 ‘춘곤증’ 생리통은 월경 전후로 발생하는 통증을 말한다. 가임기 여성의 절반 이상이 경험하며, 복통 이외에 구토·설사·요통·두통 등 다양한 증상이 동반되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 생리통은 생식기관의 기질적 이상이 없이 발생하는 원발성 생리통과 종양이나 다양한 질환으로 인해 이차적으로 발생하는 속발성 생리통으로 나뉜다. 원발성 생리통은 골반 내에 뚜렷한 병변 없이 발생하는 것으로, 월경 시작 직전 혹은 직후에 발생하며 2∼3일 정도 통증이 지속된다. 생리 기간 중 자궁내막에서 생성되는 프로스타글란딘이라는 물질이 과다 분비되어 자궁 수축을 유발해 통증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생리통이 새로 나타나거나 강도가 심해지고 통증 발생 기간이 길어진다면 자궁근종이나 자궁내막증과 같은 질환을 의심해볼 수 있다. 자궁근종은 자궁의 근육층에서 발생하는 종양이다. 증상이 없는 경우도 있으나, 생리통·생리과다·빈혈 등 다양한 증상을 유발한다. 자궁 샘 근육증(자궁선근증)은 자궁 근육층이 일부 또는 전체적으로 두꺼워지는 질환으로 생리통 및 생리과다의 흔한 원인이다. 자궁내막증은 자궁내막 조직이 자궁 밖의 복강 내 조직, 난소 등에 부착되어 자라는 질환으로 심한 생리통, 만성 골반통, 난임 등 다양한 증상을 일으킨다. 이때 생리통은 생리 전부터 시작되어 생리 기간 내내 지속되기도 한다. 생리통은 원인이 다양한 만큼 치료 방법도 다양하지만, 크게 증상 완화를 위한 약물요법과 생리통을 유발하는 질환이 있는 경우 이를 제거하는 수술적 치료가 있다. 원발성 생리통의 경우는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억제하는 소염진통제의 복용을 통해 증상을 조절하며, 경구피임제 등의 호르몬 제재도 효과적인 약물치료 방법이다. 안과 제대로 눈 뜨기 어렵다면 수술해야 윗눈꺼풀에는 눈꺼풀 올림근이라 불리는 상안검거근이라는 근육이 있다. 이 근육의 힘이 약해지면 눈꺼풀이 아래로 처지거나 눈꺼풀의 틈새가 작아지게 되는데, 이를 ‘안검하수’라고 한다. 안검하수는 선천성과 후천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선천성은 주로 상안검거근의 발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힘이 약한 경우가 많다. 선천성 안검하수가 있는 아이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다. 목을 가눌 나이까지 성장한 후엔 정면의 물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 고개를 들거나 눈썹과 이마를 올리고 턱을 치켜들어 바라보게 된다. 증상이 심해지면 시력이 발달하지 못해 약시가 될 수 있으니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후천성 안검하수는 외상으로 인한 근육 또는 신경의 손상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노화로 인한 근육기능의 저하로 인해 나타난다. 후천성의 경우도 처진 눈꺼풀이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에 시력저하, 두통뿐 아니라 턱을 들어 올리는 버릇으로 인한 목 통증이 나타난다. 눈꺼풀을 움직이기 위해 이마 근육을 자주 사용해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기기도 한다. 안검하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눈꺼풀이 처진 정도와 상안검거근의 상태에 따라서 수술방법을 정한다. 상안검거근의 기능이 남아 있는 상태라면 올림근 절제술을 시행한다. 윗눈꺼풀의 근육 일부를 잘라내고, 눈꺼풀을 뒤로 올려서 눈꺼풀 판에 봉합해 기능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상안검거근의 기능이 없거나 미약하다면 이마 근육을 사용하는 전두근 걸기법을 시행한다. 근육막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를 이식해 윗눈꺼풀을 이마 근육에 연결·고정해 눈꺼풀을 올리는 방법이다. 안검하수 수술을 미용차원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시력저하나 목 통증, 눈의 피로감 등 시야를 지속적으로 방해해 생기는 여러 건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신생아와 어린아이의 경우 시력발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성장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글 이정윤·의학신문 기자(자료제공 전원생활)

인물

42세에 등단해 일본의 국민 작가가 된 마쓰모토 세이초

마쓰모토 세이초는 단순한 추리소설가를 넘어 일본 문학의 거인이자, 진정한 국민작가로 인정받았다. 살아 생전에 750여 권의 책을 썼고, 수필을 포함해서 약 1,500편의 작품을 남긴 괴물 작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그가 첫 소설을 발표했을 때 나이는 42세였다. 신문사 기자의 꿈이 좌절되다 작가가 되기 전까지 세이초는 신문사의 기자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사히 신문사의 인쇄공으로 일하면서 갖게 된 꿈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독서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가 신문사의 기자가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노점상을 하던 부모님을 포함해 아내와 자녀까지 그에게는 모두 8명의 부양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짐이 있었다. 게다가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1950년대 초반은 패전의 여파로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다. 물가는 치솟고, 기초적인 생필품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가 닥치는 대로 돈을 벌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글을 쓰고 작가가 된다는 꿈은 사치스러운 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월급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빗자루를 판매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빗자루를 만드는 데는 특별히 돈이 들지 않았다. 산이나 들에 가서 흔한 싸리나무와 수수대를 엮어서 빗자루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빗자루는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문제는 많은 빗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깨 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빗자루를 들고 기차로 여러 도시를 이동하며 빗자루를 판매하는 것이 쉬운 일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빗자루 판매는 그에게 예상치 못했던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바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낯선 도시들을 방문하면서 세이초는 남들이 모르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그가 훗날 수많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거대한 토양이 되었다. 42세부터 소설가의 길을 걷다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역사는 1951년부터 극적으로 펼쳐진다. 〈주간 아사히〉에서 ‘백만 인의 소설’을 공모했는데, 응모를 결심한 세이초는 출퇴근 시간에 걸어 다니면서 줄거리를 구상하고, 더운 여름에 모기장 속에서 원고를 써나갔다. 그의 데뷔작 ‘사이고사쓰’는 공모전에 응모한 총 992편 중에서 3등으로 뽑혔다. 원래는 더 높은 등수였는데 같은 아사히 신문사 직원이라는 이유로 밀려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 속에서 묵묵히 문학의 꿈을 키워온 세이초의 세계가 열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때부터 세이초는 신문사 생활 외에는 작품을 쓰는 데 모든 시간을 바쳤고, 1952년 미타문학에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을 발표했다. 비록 재능은 있지만 고단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주인공 고사쿠는 세이초 자신의 초상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대중 소설을 시상하는 나오키상에 후보로 올랐지만 낙선한다. 그러나 당시 나오키상 심사위원이었던 나가이 다쓰오에 의해 “이 작품은 나오키상이 아니라 아쿠타가와상에 더 적합한 작품”이라는 평을 들었고, 후에 순수문학을 시상하는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47세에 과감하게 아사히 신문사를 퇴직하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1956년에는 23편, 1957년에는 33편의 작품을 쓸 정도로 창작력에 불이 붙으면서 ‘공부하면서 쓰고, 쓰면서 공부한다’는 각오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이초는 본격적으로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탐정소설을 좋아했던 세이초가 인간성이 드러나는 탐정소설을 읽고 싶다는 평소의 꿈을 직접 실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8년에 출간한 첫 장편소설 ‘점과 선’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추리소설 작가로의 위상을 확실히 다지게 된다. 또한 이 소설로 트릭이나 범죄에 매달리기보다는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드러냄으로써 인간성의 문제를 파고드는 ‘사회파 추리소설’ 붐을 일으킨다. 단순히 사건 해결에 그치지 않고, 일상의 삶을 묘사하면서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의 악을 그려낸 새로운 문학이 탄생한 것이다. 사망할 때까지 글 쓰는 데 전력투구 “전력투구, 시간이 없어. 너무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시간이 없어.” 다른 작가들보다 출발은 조금 늦었지만 그래서 그는 작품을 쓰는 데 지치지 않았다. 대중들이 세이초에게 거장이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은 그가 수준 높은 작품을 동시에, 대량으로 집필하는 엄청난 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1960년대 베스트셀러 목록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그의 소설 작품들은 해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대중적인 인기는 그대로 영화나 드라마로 이어졌다. 모두 36편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었고, TV 드라마로 제작된 것은 436편에 달한다. 보편적인 주제로 인간을 묘사하고, 역사와 사회의 어둠을 파헤치려 했던 세이초의 작품 활동은 1992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끊임없는 공부와 불굴의 정신력으로 자신을 채찍질했던 세이초였기 때문에 소설, 논픽션, 수필 등으로 창작 세계를 계속 확장할 수 있었다. 꿈을 향해 도전하고, 성공의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젊은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성공의 가능성이 언제나 나이를 초월해서 열려있다는 믿음, 그것이 마쓰모토 세이초가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이었을 것이다. 힘든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 마쓰모토 세이초는 주도면밀하게 미래를 준비했고, 전략적으로 노년의 시간과 맞섰다. 글 김대근·NH농협은행 은퇴연구소 선임연구원

여행

정중동 망중한, 휴가의 방식

정중동(靜中動), 망중한(忙中閑).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바쁜 가운데 한가로움이 있다. 휴가철이 다가오면 저마다 휴가를 즐길 계획을 짤 것이고, 그에 적합한 휴가지를 찾아 나설 것이다. 흔하기로는 바다와 계곡이겠지만, 그냥 피서로는 뭔가 밋밋하다. 이왕에 조용히 지내기로 한 바에는 하품이 날 정도로 한가롭게 지내거나, 기왕에 활기차게 보내기로 할 바에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재미에 빠져들 수 있는 곳을 한번 찾아보자. 하늘 내린 물줄기 인제 내린천 래프팅은 인간의 원시에서 비롯했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뗏목을 물에 띄워 수렵과 이동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것은 때로 미지의 땅을 찾아나서는 개척의 도구이기도 했고, 목숨을 건 삶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삶의 고난은 사라지고 스릴과 재미를 즐기는 유희만이 남았다. 우리나라에 래프팅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70년대 초 미군용 고무보트가 보급되면서부터. 그러나 장비 부족에다 적절한 코스가 개발되지 않아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즐기는 동호인만 몇몇 있었을 뿐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속속 생겨난 동호인 클럽과 대학 동아리들을 중심으로 보급에 앞장선 데다, 레저스포츠 업체들이 본격적인 레포츠 종목으로 개발에 나서면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래프팅이 여름 레포츠로 활황을 누리면서 많은 폐단도 불러왔다. 물 맑고 경관 좋은 강들이 떼를 지어 몰려드는 래프팅객들로 몸살을 앓았고, 강 주변은 난립한 업소와 행락객들로 뒤엉켜 단숨에 무분별한 유흥지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래프팅은 여러 사람이 호흡을 맞춰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하므로 협동심을 기를 수 있고, 거센 물결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과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미덕도 있다. 어떻게 즐기느냐의 문제이지 즐기는 것이 어찌 잘못일까. ‘하늘이 내린 물줄기’라는 강원 인제의 내린천은 래프팅을 비롯해 번지점프, 산악자전거, 모터사이클, 패러글라이딩 등 한여름 레포츠의 천국이다. 뿐만 아니라 합강정에서 거슬러 올라 을수골에 이르는 70여㎞의 긴 물줄기는 어디나 천혜의 물놀이 터이며 천렵의 명소다. 거기에 미산계곡과 살둔산장 등에서 맛볼 수 있는 강마을의 정취는 ‘가장 한국적인 강’이라는 내린천이 주는 푸근한 덤이다. 그래도 역시 래프팅이 내린천 레포츠의 꽃이다. 아니 내린천이야말로 래프팅의 최적지다. 맑은 물과 풍부한 수량, 계곡의 뛰어난 풍치, 다양한 난이도의 급류코스 등 본격적인 래프팅을 즐기기에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 대부분의 래프팅은 고사리 원대교에서 시작되며, 밤골 쉼터까지 8㎞ 구간에 3시간이 소요된다. 내 마음의 덕적도 옹진 덕적도 어여 가라/ 잃었던 것 되찾으러 뱃길 세 시간/ 해발 제로의 길/ 작게 흔들려도 몸 전체가 흔들리는 배를 타고/ 아침 일찍 어여 가야 하니/ 등은 달빛이 두드려 주고 있으니/ 야속하다 말고/ 되찾을 것 있는 너는 어여어여 가라하고/ 고욤나무 아래 서서/ 오래 바라다본 달빛 푸른 바다/ 잃었던 것 되찾는 황홀함/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내겐/ 무엇이 있을 거란 말인가/ 찬 들국 향이여/ 내 마음의 덕적도는 어디에 있는가 -함민복 ‘한밤의 덕적도’ 중에서 함민복 시인은 강화도에 산다. 어느 날 아랫집 동생이 찾아와 저번 사릿발에 떠내려간 자기 배가 열흘 만에 덕적도에서 발견되었다고, 날이 새면 덕적도로 배를 찾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배를 찾은 기쁨에 거나하게 취한 동생은 시인에게 등을 두드려 달라고 성화다. 그런 동생을 보며 시인은 마냥 부럽기만 하다.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내게는 되찾을 그 무엇이 있단 말인가. 대부도 방아머리 선착장에서 덕적도 가는 카페리에 차를 얹을 때, 문득 시인의 부러움이 떠오른다. 나는 덕적도에서 무엇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거기 내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 있기는 할 것인가. 대부도에서 배를 타면 자월도 거쳐 덕적도까지는 1시간 50분 거리.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배가 파도를 헤쳐 가는 내내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덕적도 진리 도우선착장에 차를 내렸을 때 우선 이방의 코를 적시는 건 바닷내음보다는 솔향이다. 그것은 묘한 안온함을 준다. 덕적도가 덕적군도에서는 가장 큰 섬이고, 한때 연평도 조기잡이의 전진기지로 호황을 누렸던 곳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어업이 쇠퇴하면서 섬은 마치 한적한 휴양지의 모습을 닮아 있다. 선착장이 끝나기 무섭게 나타나는 나무데크부터가 그렇다. 거기서부터 덕적 앞바다를 바라보며 해안산책로를 걷다보면 이윽고 아늑한 노송군락이 펼쳐진다. 차를 타고 섬을 한 바퀴 휘 돌아볼 수도 있지만 덕적도의 진면목을 보려면 아무래도 비조봉과 국수봉으로 이어지는 섬 트레킹 코스를 밟아야 한다. 비조봉 정상의 비조정에 서면 발아래 문갑도며 선갑도, 각흘도, 백야도까지 30여 개 덕적군도의 섬들이 올망졸망하다. 산을 내려가면 서포리해수욕장이고, 길을 더하면 능동자갈마당이며, 바닷길로 길을 되돌리면 밭지름해수욕장이다. 밭지름과 서포리의 하얀 모래밭이거나 능동의 검은 자갈밭이거나 덕적도의 바닷가는 하나같이 아늑하다. Tip1 나는야 이카루스의 후예 문경 활공랜드 물길을 달렸다면 이젠 하늘을 한번 날아보자.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간의 오랜 열망은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았다는 이카루스의 신화를 낳기도 했지만, 패러글라이딩은 하늘을 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것은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과 달리 3차원 공간을 움직이는 운동이므로 배워야 할 것도 많고, 많은 연습이 필요하며 따르는 위험도 작지 않다. 경북 문경의 활공랜드는 패러글라이딩을 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춘 국내 정상급 활공장이다. 이륙장에 서면 문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지형이 분지 형태를 이뤄 상승기류 형성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풍향이 서북풍으로 안정적 기류가 유지되는 장점도 있다. 또한 주변에 고압선 등 위험 시설이 전혀 없어 안전하게 활공을 즐길 수 있다. 문경활공랜드 일대는 주흘산, 주령산, 포함산, 대미산, 백화산 등 백두대간의 줄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가까이 문경온천이 있어 활공 후 쌓인 피로를 풀 수 있으며, 문경새재 트레킹이나 진남교반 레일바이크 체험을 겸할 수도 있다. 하늘재 가는 길의 관음리도 빼놓을 수 없다. 관음리는 조선시대 사기 가마터가 있던 곳이다. 지금도 관음요를 비롯한 전통 가마들이 있어 고요함 속에 맹렬한 불꽃을 태우고 있다. Tip2 한적한 바다가 주는 선물 태안 꾸지나무골 충남 태안에서 603번 지방도로를 타고 20㎞ 넘게 달리면 이원반도의 끝자락 만대에 이른다. 가로림만을 사이에 두고 서산 대산의 벌말과 마주하고 있는 만대마을은 호젓한 포구와 염전들로 갯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옛날 한 풍수쟁이가 ‘세기말에 가서는 많은 사람이 사는 풍요로운 마을이 될 것’이라고 마을 이름을 ‘만대’라 했다지만 세기말을 훨씬 넘긴 지금까지도 여전히 20여 가구를 넘지 못하는 오지마을일 뿐이다.만대에서 다시 온 길을 거슬러 내려오면 꾸지나무골이 나온다. 작고 아담한 해변가의 꾸지나무골은 ‘아늑하고 정겹다’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곳이다. 하루에 버스가 대여섯 번밖에 다니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꾸지나무골은 그래서 아는 사람만 다시 찾는 숨겨진 해수욕장이다. 1㎞가 채 넘지 않는 백사장은 태고적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해변을 둘러싼 송림은 야영장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꾸지나무골 남쪽으로는 학암포를 넘어 신두리의 해안사구로 이어지며, 천리포·만리포로 유명한 소원반도에는 원시 어로의 면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의항리 독살이 있다. 또한 파도리의 해옥이나 낭금의 자염 생산지 등 태안 해안의 곳곳에는 자연과 사람의 삶이 빚어놓은 흔적들이 오롯이 박혀있다. 이원의 밀국낙지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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