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강제 전성기’ 누리는 배우 김응수
“전 배우로서 지금이 너무 좋아요. 일찍 핀 꽃은 일찍 지고, 늦게 핀 꽃은 늦게 지게 마련이잖아요. 인생 2막도 곱게 물든 단풍처럼 살고 싶어요. 꽃은 예뻐도 땅에 떨어지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지만, 단풍은 땅에 떨어져도 주워서 책갈피도 하고 그러잖아요.”
연기 데뷔 40년 만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배우 김응수(59). 그는 자신 앞에 새롭게 열린 인생 2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햇볕이 내리쬐던 8월의 어느 날,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곱게 물든 단풍처럼 차곡차곡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김응수는 지난해 영화 ‘타짜’(2006)에서 맡은 곽철용 역할이 재조명되면서 ‘강제’ 전성기를 맞았다. 인터넷 공간에서 ‘묻고 더블로 가!’ ‘마포 대교는 무너졌냐?’ 등의 패러디가 유행하면서 100개가 넘는 CF 제의가 쏟아졌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꼰대인턴’에서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TV 미니시리즈 주연을 꿰찼다.
“십수년 전 끝난 영화로 다시 주목을 받는다니 처음에는 황당했죠. 그런데 결국은 젊은 친구들이 ‘곽철용 신드롬’의 주인공이더라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 돼 백수로 살아가는 답답한 현실 속에 갇혀 있잖아요. 그런 젊은이들의 고통, 고민, 울분을 한방에 해결해주는 게 곽철용 대사가 아닌가 싶어요. 지금 처한 어두운 현실을 한방에 역전시키고 한방에 뒤집는 건 ‘묻고 더블로 가!’밖에 없잖아요.”
데뷔 40년 만에 전성기…CF 제의 쏟아져
드라마 ‘꼰대인턴’에서 최악의 꼰대 부장에서 열혈 인턴으로 변해가는 ‘시니어 인턴’ 이만식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그는 ‘꼰대’의 정의에 대해서 묻자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꼰대’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내 생각대로 상대방이 움직여주길 바란다면 꼰대죠. 그런데 꼰대짓은 남녀노소 구분이 없어요. 중학생이 초등학생한테 꼰대짓을할 수도 있는 거죠.”
한번도 자신이 꼰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김응수는 실제로 드라마 현장에서도 젊은 배우, 감독, 스태프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잘 어울릴 정도로 인기가 좋다. 그는 “드라마 현장 스태프가 80~100명 되는데, 막내까지 이름을 다 외워서 불러주면 너무나 좋아한다”면서 “늘 상대방보다 두 살 아래라는 생각으로 눈높이를 낮춰서 대화에 임하면 다들 마음을 열더라”고 귀띔했다.
어떤 캐릭터든 ‘재미’ 살리려 애써
1981년 대학교 1학년 때 극단 ‘목화’에 입단해 연기에 입문한 그는 대학로는 ‘마음의 고향이자 뿌리’라고 말했다. 지금도 수입의 3분의 1을 여전히 대학로를 지키는 선후배 연극인들에게 쓸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돈벌이가 안 되는 연극배우를 한다고 하니 ‘부자지간의 연을 끊자’고 하실 정도로 반대가 심하셨죠. 극단에 들어가서도 작품이 없을 때는 손병호 등 동료들과 새벽까지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채소를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텼어요. 하지만 가난해도 함부로 살지 않았어요. 연극인들이 지금도 그렇듯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바른 길로 잘 살아왔죠.”
방송국에서 작가로 일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도 ‘연극’ 덕분이었다. KBS 교양 프로그램 ‘사랑방중계’의 작가였던 아내와는 ‘올해의 연극인’ 인터뷰로 인연을 맺었다. 지금은 두 딸과 함께 네 식구가 즐겁게 살고 있다.
일본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한 그는 1996년 영화 ‘깡패수업’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했다. 출세작인 드라마 ‘추노’의 좌의정 이경식 역을 비롯해 ‘해를 품은 달’의 영의정 윤대형 역 등 사극에서 무게감 있는 역할도 있지만 누아르, 코미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페이소스가 살아 있는 캐릭터를 소화했다. 추후 영화감독 데뷔는 물론 멜로 장르를 부활시켜보고 싶다는 꿈 또한 여전히 갖고 있다. 그는 “나의 연기 철학이자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재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이건 코믹한 캐릭터건 재밌게 표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고의 노후 대비책은 ‘건강’
김응수의 인생 2막의 테마는 딱 하나다. 바로 ‘두 다리로 땅을 짚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 그는 은퇴 전후의 동년배들에게도 “돈보다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게 바로 건강”이라면서 “인생의 승부는 돈이 아니라 체력이라고 생각한다. 보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인생을 향해서 걸어라”고 조언했다.
김응수의 가장 큰 경제 원칙은 ‘티끌 모아 태산’이다.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고 은행에 적금 위주로 차곡차곡 모으는 안정형 재테크를 선호한다. 김응수는 “충남 서천에 계신 어머니도 농협을 애용하셨다. 시골에서는 농협이 가장 신뢰 가는 금융기관이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저는 생활 속에서 절약해서 에너지를 아끼고 환경을 지키자는 주의예요. 촬영장에서도 분장실에 쓸데없이 불이 켜져 있으면 바로 끄죠. 개인적으로는 연예인들이 본업 외에 부동산이나 창업 등에 골몰하는 것이 별로 좋게 보이지 않더라고요. 물론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경제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최고의 노후 대비이자 재테크는 건강 아닐까요? 노후에 80세까지 배우 활동이 가능하다면 곧 경제적 활동과 연결이 되니까요.”
그는 건강을 위해 매일 새벽같이 북한산 진관사 자락을 두 시간 산보하는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꽃 사진을 찍어서 아는 배우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다. ‘꼰대인턴’에 함께 출연한 박해진을 비롯해, 아침마다 그가 ‘꽃모닝’이라며 보내는 꽃 사진에 아침을 여는 지인들도 상당수 된다. 그리고 친척인 도올 김용옥과 일주일에 한두 번 대한민국과 세계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배움에는 언제나 희열이 있다”면서 활짝 웃었다.
건강만큼 중요한 인간관계, 비결은 ‘존중’
그는 건강한 노후를 위해 중요한 인간관계의 철칙은 “절대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옳은 인간관계를 맺고, 상대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게 중요해요. 가족 관계든, 부부 관계든, 친구 관계든 사람 사이에 이익을 생각하지 않으면 관계가 다 잘됩니다. 보통 계산하고 이익을 따지다가 관계를 그르치게 되는 거지요.”
그는 젊은이의 최고의 특권이자 가치인 무한한 가능성은 부럽지만, 다시 불안했던 질풍노도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경제든 어떤 분야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싶단다. 그는 도올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생 후반기의 테마는 ‘버리는 재미’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젊었을 때 무조건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것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버리는 재미가 쏠쏠해요. 한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일도 나중에 되돌아보면 ‘아, 내가 잘못 알았구나, 내가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알게 돼요. 살아간다는 게 별게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자꾸 버리려고 하죠. 그걸 입으로 버리면 잔소리고 지갑(돈)을 버려야 되는데(웃음)…. 버리는 재미, 그것이 사람이 살면서 생기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요?”
글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eri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