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인물

71세에 첫 전시회를 연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

루이즈 부르주아는 9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과 상처에 맞서 싸웠다. 71세에 첫 전시회를 통해 이름을 알린 그녀는 노년의 나이에 예술을 통해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냈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녀는 진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불우한 가정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 1911년 루이즈 부르주아는 파리의 직물 사업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림을 그리듯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면서 그녀는 그림과 익숙해졌다.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녀의 가정이었다. 어린 시절의 불우한 가정환경은 기억 속에 오래 각인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반면 어머니는 폐쇄적이고 둔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를 ‘전제군주’라고 말했을 만큼 어린 시절에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가족의 갈등이 직접적으로 표면에 나타난 것은 언니와 남동생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상처를 받던 그녀는 그 때문에 극도의 긴장과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훗날 예술과 창작의 혼을 지켜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받은 정신적 불안감 때문에 부르주아는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체계에 이끌렸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과 기하학을 전공하면서 그녀는 다시 그림과 조각의 세계로 넘어가는 전기를 맞았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고통과 상처, 갈등과 정신적 분열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이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70세가 넘어 첫 전시회를 개최 예술사를 전공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한 루이즈 부르주아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뉴욕으로의 이주는 그녀가 유럽의 엄격한 지적 전통에서 벗어나서 보다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분위기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30대 중반에 이미 예술계에 등단하긴 했지만, 변변히 내세울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속적인 창작활동은 곧 자신이 얽매여 있던 불행한 가족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그녀의 예술 인생도 빛을 보기 시작한다. 그녀의 나이 71세 때의 일이다. 그녀는 대기만성의 작가였다. 그 이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긴 여정을 지나왔다. 그 과정에서 고통은 그녀를 지탱해준 힘이었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녀가 무명에 가까운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시작된 불행한 운명을 극복하려는 의지였다. 작업을 하는 순간만은 그녀가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작품을 계속해서 창작했다. 그녀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것은 80세가 넘은 시점이었다. 그때서야 그녀는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미술계에서 뒤늦게 인정을 받은 것은 그녀가 평생 몇 번 안되는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견뎌냈고 극복했다. 예술을 통해 살아남는 것,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그녀의 삶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직시하는 순간부터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예술을 통해 인생을 완성하다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 유년시절의 기억과 상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평생토록 자기 마음속의 상처와 맞서 싸웠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어두운 그늘이자 어깨에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예술을 선택했다. 거대한 거미를 소재로 한 그녀의 대표작 ‘마망(Maman)’은 대도시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모성적 본능을 형상화한 그녀의 대표작이다. 그녀의 작품은 뉴욕, 파리, 런던 등 세계주요 도시를 가면 만나볼 수 있다. 서울에도 두 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녀의 거미 연작 시리즈는 도시 한가운데서 행인들에게 불안한 심리를 자극한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흉측하다 해도 거미 조각상 밑으로 들어가면 왠지 모를 따스함과 평온함을 느끼게 된다. 거미는 모성애가 강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이 세상의 어떤 동물보다 모성애가 강한 거미를 형상화해서 세계의 도시 곳곳에 ‘거미’를 세워놓았다. ‘마망’은 바로 상처받은 이들의 엄마가 되고자했던 그녀의 정신을 담고 있다. 그녀는 ‘80세에 찾아온 성공’이라고 떠들어대는 언론을 향해 이야기했다. “성공이라고요? 물론 그동안 내가 미술계 언저리에서 지내오긴 했지만 프랑스 와인과 같이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무르익지요.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소유하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줍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내린 인생의 결론은 이렇다. “예술은 온전한 정신을 보장해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해왔던 가장 중요한 얘기다.” 글 김대근 NH농협은행 은퇴설계전문위원

여행

언덕 밑 정동 길엔 – 시월 정동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 이영훈 작사·작곡, 이문세 노래 〈광화문 연가〉중에서 아무리 코로나가 극성을 떨어도 가을은 오고 또 깊어가리라.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속에 마음과 표정을 가둬버린 엄혹한 시절이지만 어찌 추억마저 잃어버릴까. 시월, 덕수궁 돌담길의 추억을. 예년 같으면 ‘시월 정동’ 축제로 북적였을 정동 길을 이제 고즈넉이 추억으로라도 걸어보리라. 기실 정동길엔 더 오랜 시간의 기억이 담겨 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정동의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정동’이란 이름부터가 조선 개국 후 최초로 조성된 왕릉인 정릉이 애초 위치한 데서 비롯하지만 조선이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이 태어나는 어간에서 정동은 저물어가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를테면 조선의 시작과 끝이 담긴 길이랄까. 굳이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도 좋다. 정동 길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고 그 잎들 흩날리면 우리들의 추억도 시나브로 깊어만 간다. 왕조가 저물고 근대가 탄생하는 그때 그 정동 길 프란치스코교육회관의 성 프란치스코 상. ‘가난한 성자’는 넉넉한 가을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구 러시아공사관 탑부. 사적 제253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구한말 역사의 한 장면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정동 길 산책은 경향신문사 쪽 입구에서 시작한다. 경향신문사를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이 프란치스코교육회관이다. 1988년 개원한 프란치스코교육회관은 1923년 무렵 경성외국인학교가 이전한 곳이기도 하다. 가톨릭 신자들의 피정과 각종 모임을 위한 도심 속의 영성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다음으로 캐나다대사관 옆 골목을 오르면 언덕바지에 자리한 옛 러시아 공사관을 만난다. 조·러통상조약 체결에 따라 1890년 이곳에 들어선 러시아공사관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급히 피신하였던 이른바 ‘아관파천(1896)’의 현장이다. 현재는 3층 탑부만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덕수궁으로 이어지는 길은 ‘고종의 길’로 명명되었다. 이번에는 중명전이다. 덕수궁 외곽에 위치한 중명전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고종의 집무실이자 외국사절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에는 황태자(순종)와 윤비의 가례(嘉禮)가 거행된 역사적 장소다. 1925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복원을 거쳐 전시관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가까이 정동극장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의 명맥을 잇고 있는 곳으로, 전통 상설공연과 창작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 교회당인 정동교회는 건물 자체의 건축적 의미도 있지만 미국공사관, 이화여고, 배재학당과 인접했던 곳으로 미국문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는 중심지였다는 건축 외적 의미도 간직하고 있다. 개신교가 우리 땅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84년으로, 천주교보다 150년이 늦은 뒤였다. 1885년 선교를 위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인 아펜젤러 목사는 활동무대를 정동으로 정하고, 1897년 배재학당의 설립과 함께 정동교회를 세웠다. 정동교회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빅토리아식 예배당으로, 붉은 벽돌을 사용한 비교적 간결하고 중후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남쪽 모퉁이에 솟은 사각의 종탑은 첨탑이 아닌 평탑으로 이 건물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정동교회가 특히 사랑스러운 것은 노래 때문이다. 에 나오는 ‘눈 덮인 조그만 예배당’의 모델이 바로 정동교회다. 정동교회 맞은편에는 를 작사·작곡한 이영훈의 노래비가 서 있다. 2008년 타계한 그를 기리기 위해 가수 이문세를 비롯한 지인들이 2009년 세운 기념비다. 중명전은 덕수궁 내에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나 지금은 덕수궁 밖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공사관을 설계하기도 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작품이다. 돌담길 켜켜이 깔린 시월의 추억 가을 정동길엔 커피향이 그윽하다. ‘마음을 내려드린다’는 한 카페의 간판 문구가 향그럽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 잠시 들렀다가 이내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다. 시월을 걷는다. 이 사붓한 돌담길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깔려 있는 것일까. 높다란 담장 위로 담장보다 더 키 큰 나무들이 푸르름을 다하고, 서서히 붉고 노란 빛으로 갈아입는다. 어느덧 그 빛마저 지고 나면 저 담장 위로, ‘조그만 교회당’ 위로 눈은 내려 덮이리라. 그렇게 세월이 간다 한들 우리의 추억마저 덮이고 사라질까. 아니 그런다한들, 그럴 때까지라도 걷고 또 걸으리라. 마지막 빛 한 줌조차 다 사라져 이윽히 어둠으로 덮일 때까지. ‘시월의 마지막 밤’까지. 글 유성문 여행작가

인터뷰

‘강제 전성기’ 누리는 배우 김응수

“전 배우로서 지금이 너무 좋아요. 일찍 핀 꽃은 일찍 지고, 늦게 핀 꽃은 늦게 지게 마련이잖아요. 인생 2막도 곱게 물든 단풍처럼 살고 싶어요. 꽃은 예뻐도 땅에 떨어지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지만, 단풍은 땅에 떨어져도 주워서 책갈피도 하고 그러잖아요.” 연기 데뷔 40년 만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배우 김응수(59). 그는 자신 앞에 새롭게 열린 인생 2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햇볕이 내리쬐던 8월의 어느 날,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곱게 물든 단풍처럼 차곡차곡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김응수는 지난해 영화 ‘타짜’(2006)에서 맡은 곽철용 역할이 재조명되면서 ‘강제’ 전성기를 맞았다. 인터넷 공간에서 ‘묻고 더블로 가!’ ‘마포 대교는 무너졌냐?’ 등의 패러디가 유행하면서 100개가 넘는 CF 제의가 쏟아졌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꼰대인턴’에서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TV 미니시리즈 주연을 꿰찼다. “십수년 전 끝난 영화로 다시 주목을 받는다니 처음에는 황당했죠. 그런데 결국은 젊은 친구들이 ‘곽철용 신드롬’의 주인공이더라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 돼 백수로 살아가는 답답한 현실 속에 갇혀 있잖아요. 그런 젊은이들의 고통, 고민, 울분을 한방에 해결해주는 게 곽철용 대사가 아닌가 싶어요. 지금 처한 어두운 현실을 한방에 역전시키고 한방에 뒤집는 건 ‘묻고 더블로 가!’밖에 없잖아요.” 데뷔 40년 만에 전성기…CF 제의 쏟아져 드라마 ‘꼰대인턴’에서 최악의 꼰대 부장에서 열혈 인턴으로 변해가는 ‘시니어 인턴’ 이만식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그는 ‘꼰대’의 정의에 대해서 묻자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꼰대’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내 생각대로 상대방이 움직여주길 바란다면 꼰대죠. 그런데 꼰대짓은 남녀노소 구분이 없어요. 중학생이 초등학생한테 꼰대짓을할 수도 있는 거죠.” 한번도 자신이 꼰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김응수는 실제로 드라마 현장에서도 젊은 배우, 감독, 스태프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잘 어울릴 정도로 인기가 좋다. 그는 “드라마 현장 스태프가 80~100명 되는데, 막내까지 이름을 다 외워서 불러주면 너무나 좋아한다”면서 “늘 상대방보다 두 살 아래라는 생각으로 눈높이를 낮춰서 대화에 임하면 다들 마음을 열더라”고 귀띔했다. 어떤 캐릭터든 ‘재미’ 살리려 애써 1981년 대학교 1학년 때 극단 ‘목화’에 입단해 연기에 입문한 그는 대학로는 ‘마음의 고향이자 뿌리’라고 말했다. 지금도 수입의 3분의 1을 여전히 대학로를 지키는 선후배 연극인들에게 쓸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돈벌이가 안 되는 연극배우를 한다고 하니 ‘부자지간의 연을 끊자’고 하실 정도로 반대가 심하셨죠. 극단에 들어가서도 작품이 없을 때는 손병호 등 동료들과 새벽까지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채소를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텼어요. 하지만 가난해도 함부로 살지 않았어요. 연극인들이 지금도 그렇듯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바른 길로 잘 살아왔죠.” 방송국에서 작가로 일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도 ‘연극’ 덕분이었다. KBS 교양 프로그램 ‘사랑방중계’의 작가였던 아내와는 ‘올해의 연극인’ 인터뷰로 인연을 맺었다. 지금은 두 딸과 함께 네 식구가 즐겁게 살고 있다. 일본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한 그는 1996년 영화 ‘깡패수업’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했다. 출세작인 드라마 ‘추노’의 좌의정 이경식 역을 비롯해 ‘해를 품은 달’의 영의정 윤대형 역 등 사극에서 무게감 있는 역할도 있지만 누아르, 코미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페이소스가 살아 있는 캐릭터를 소화했다. 추후 영화감독 데뷔는 물론 멜로 장르를 부활시켜보고 싶다는 꿈 또한 여전히 갖고 있다. 그는 “나의 연기 철학이자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재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이건 코믹한 캐릭터건 재밌게 표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고의 노후 대비책은 ‘건강’ 김응수의 인생 2막의 테마는 딱 하나다. 바로 ‘두 다리로 땅을 짚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 그는 은퇴 전후의 동년배들에게도 “돈보다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게 바로 건강”이라면서 “인생의 승부는 돈이 아니라 체력이라고 생각한다. 보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인생을 향해서 걸어라”고 조언했다. 김응수의 가장 큰 경제 원칙은 ‘티끌 모아 태산’이다.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고 은행에 적금 위주로 차곡차곡 모으는 안정형 재테크를 선호한다. 김응수는 “충남 서천에 계신 어머니도 농협을 애용하셨다. 시골에서는 농협이 가장 신뢰 가는 금융기관이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저는 생활 속에서 절약해서 에너지를 아끼고 환경을 지키자는 주의예요. 촬영장에서도 분장실에 쓸데없이 불이 켜져 있으면 바로 끄죠. 개인적으로는 연예인들이 본업 외에 부동산이나 창업 등에 골몰하는 것이 별로 좋게 보이지 않더라고요. 물론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경제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최고의 노후 대비이자 재테크는 건강 아닐까요? 노후에 80세까지 배우 활동이 가능하다면 곧 경제적 활동과 연결이 되니까요.” 그는 건강을 위해 매일 새벽같이 북한산 진관사 자락을 두 시간 산보하는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꽃 사진을 찍어서 아는 배우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다. ‘꼰대인턴’에 함께 출연한 박해진을 비롯해, 아침마다 그가 ‘꽃모닝’이라며 보내는 꽃 사진에 아침을 여는 지인들도 상당수 된다. 그리고 친척인 도올 김용옥과 일주일에 한두 번 대한민국과 세계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배움에는 언제나 희열이 있다”면서 활짝 웃었다. 건강만큼 중요한 인간관계, 비결은 ‘존중’ 그는 건강한 노후를 위해 중요한 인간관계의 철칙은 “절대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옳은 인간관계를 맺고, 상대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게 중요해요. 가족 관계든, 부부 관계든, 친구 관계든 사람 사이에 이익을 생각하지 않으면 관계가 다 잘됩니다. 보통 계산하고 이익을 따지다가 관계를 그르치게 되는 거지요.” 그는 젊은이의 최고의 특권이자 가치인 무한한 가능성은 부럽지만, 다시 불안했던 질풍노도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경제든 어떤 분야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싶단다. 그는 도올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생 후반기의 테마는 ‘버리는 재미’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젊었을 때 무조건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것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버리는 재미가 쏠쏠해요. 한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일도 나중에 되돌아보면 ‘아, 내가 잘못 알았구나, 내가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알게 돼요. 살아간다는 게 별게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자꾸 버리려고 하죠. 그걸 입으로 버리면 잔소리고 지갑(돈)을 버려야 되는데(웃음)…. 버리는 재미, 그것이 사람이 살면서 생기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요?” 글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e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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