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건강

건강한 일상을 위한 의학 상식

건강 관련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에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제대로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일상에서 겪는 건강 관련 궁금증과 최신 의학 정보를 알아보자. 신경과 긴장형 두통 유발하는 원인은? 긴장형 두통이란 주로 머리 양측에서 발생하며 경도 또는 중증도의 조이는 느낌을 유발하는 ‘비박동성 두통’이다. 일반적으로 평생 유병률이 30∼70%에 달하는 매우 흔한 질병으로 편두통과 달리 청소년기에 시작하는 경우가 드물고 중년기에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긴장형 두통은 신체활동에 의해 악화하지 않으며, 통증이 다소 경미하여 정확한 발병 빈도를 측정하기가 힘들다. 또한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사의 처방 없이도 약국에서 사서 복용할 수 있는 약물로 대증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빈도 측정이 어렵지만, 편두통과 더불어 가장 흔히 발생하는 두통임에는 틀림없다. 긴장형 두통은 긴장성 두통, 근수축 두통, 정신근육 두통, 스트레스 두통, 보통 두통, 본태 두통, 특발 두통으로 불리기도 한다. 긴장형 두통의 원인은 원인이 뚜렷하지 않은 특발성, 말초 통증기전, 중추 통증기전, 심인성이 있으며 키보드 작업을 하는 사무업무 종사자에게 흔히 보는 근육 스트레스 및 두통에 대한 약물 과용 등이 있다. 또한 운동 부족, 과도한 근육 사용, 좋지 못한 자세의 유지 등으로 인하여 머리 주위 근육이 지나치게 긴장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긴장형 두통의 경우 양측성 통증이며, 흔히 후두부와 후경부, 측두골, 전두골의 통증이 심하거나 때로는 광범위하게 두정부까지 통증이 뻗쳐오는 느낌을 갖는다. 통증의 성격은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느낌, 조이거나 내려 누르는 듯한 느낌, 머리가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 터져 나갈 듯하거나 띠를 두른 듯한 느낌 등 다양한 종류의 통증과 발작이 겹쳐 오기도 한다. 증상은 편두통보다 완만하게 시작하며, 일단 두통이 시작되면 증상이 다소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면서 수주일이나 수개월간 지속되기도 한다. 약물 치료는 통증에 관한 조절, 근수축에 따른 근이완제, 불안 및 우울에 따른 진정제, 항우울제 투여로 나눠 볼 수 있다. 긴장형 두통은 비스테로이드성 진통소염제로 통증의 제거가 가능하며,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약물로는 아스피린, 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을 들 수 있다. 불안이나 항우울증에 대한 약물 치료는 근이완 및 항불안 약리 작용을 갖고 있는 벤조다이아제핀을 주로 사용하는데, 긴장형 두통의 원인 중 불안이나 기타 정신적 장애로 발생하는 두통은 진통소염제만으로는 충분한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으므로, 항우울제를 같이 복용할 수 있다. 긴장성 두통을 예방하려면 무엇보다 과한 긴장을 초래할 수 있는 비생리적인 자세 이상을 갖지 않도록 하며, 적당한 휴식과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하다. 또한 가족 관계나 대인관계, 직장 생활에서 오는 갈등이나 스트레스 등을 해소할 수 있는 자가 훈련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있다. 순환기내과 초미세먼지 심한 날 가슴이 두근두근 겨울철을 맞아 늘어나는 초미세먼지가 심방세동 발생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규명됐다. 분당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강시혁 교수 연구팀은 대기오염에 따른 심방세동 발생 위험성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심장의 정상적 리듬이 깨진 상태를 부정맥이라고 하는데, 그중 가장 흔하고 대표적인 심방세동은 심방이 불규칙하고 빠르게 뛰는 질환이다. 심방세동을 포함한 부정맥은 자각증상이 없거나 비특이적인 양상으로 인해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치료가 늦어지면 뇌졸중, 뇌경색, 심장마비, 심부전과 같은 심뇌혈관질환을 유발하고 사망까지도 초래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이번 연구팀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시에 거주한 30세 이상 인구 12만 4,000여 명의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통해 평균 7.9년간 대기오염이 심방세동에 미치는 장단기 효과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연구기간 동안 서울시의 일평균 초미세먼지(PM2.5) 농도는 25.0㎍/㎥고, 미세먼지(PM10) 농도는 49.1㎍/㎥로 확인됐다. 나아가 초미세먼지(PM2.5) 농도가 10㎍/㎥ 증가하면 3일 후 심방세동으로 인한 응급실 방문율이 4.5%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기오염은 장기적으로 동맥경화성 질환을 유발하고 단기적으로는 자율신경계 균형을 파괴할 수 있다. 연구팀은 심방세동의 경우 심방세동은 심장의 전기적인 심장박동이 저해되면서 발생하는 만큼 자율신경계 균형과 연관성이 높다며, 이전부터 심방세동이 있었지만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환자가 고농도의 초미세먼지에 노출되면서 심방세동 증상이 심하게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평소 심혈관질환을 앓고 있다면 초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실외활동을 자제하고, 심장에 이상 증상이 느껴지면 바로 전문의의 진료를 받는 것이 좋다. 이비인후과 목소리가 변했다면? 한 번쯤 후두암 의심 서울에 사는 박모 씨(62세)는 최근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가 거칠어졌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가벼운 염증이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병원을 찾아 검사한 결과 후두암 진단을 받게 됐다. 후두암은 숨 쉬고 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후두에 생기는 암으로, 이비인후과 역에서는 흔한 암 중 하나다. 하루에 한 갑 이상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후두암 발병률이 10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40대에서 60대의 중장년층 남성에게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성의 후두암 발생률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후두암의 대표적인 증상은 목소리가 변하는 것으로, 이는 대부분의 후두암이 성대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성대 표면은 매끄럽고 부드러운데, 후두암이 발생하면 성대 표면이 거칠어지고 단단해져 목소리가 변하기 시작한다. 또한 후두암이 진행되면 이물감이 느껴지거나, 호흡 곤란이 발생하는 등 같은 후두암이라도 병변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 증상이 다르다. 비흡연자의 후두암 발병률은 전체 후두암의 5% 미만일 정도로 흡연자의 후두암 발병률이 높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가까운 이비인후과를 방문하여 후두 내시경을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것이 좋다. 후두암의 치료는 외과적 절제술, 방사선, 항암치료를 기본으로 하며 암의 크기와 위치, 전이 여부에 따라서 치료방법을 결정하게 된다. 특히 후두는 말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후두암 치료 후엔 어느 정도 발성의 장애가 발생한다. 암을 포함한 주위 조직을 가능한 광범위하게 치료하면 암의 재발 가능성이 낮아지지만 발성의 장애는 더 깊어진다. 때문에 의료진은 적절한 치료 범위를 정하기 위하여 많은 고민을 한다. 특히 후두에 인접해 있는 하인두라는 기관에까지 암이 퍼지면 치료 후 음식물 섭취에 어려움이 발생하여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지므로 더욱 신중하게 치료 범위를 결정한다. 글 이정윤·의학신문 기자(자료제공 전원생활)

인물

72세에 귀주대첩으로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낸 강감찬

강감찬은 거란의 대군을 격퇴한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고려시대의 명신이다. 강감찬은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고 있다. 36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다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948년 금주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현재 서울의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로 학문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강감찬의 부친인 강궁진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 열전에 의하면 강감찬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983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는데 이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 관직에 오르고 1009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26년간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1010년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강감찬은 거란의 2차 침입 때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왕의 피신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하지만 현종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이듬해 1월 거란군이 철수하였다. 현종은 강감찬이 문하평장사에 임명될 때 홀로 피신을 주장한 것을 언급하며 “그때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며 그 공을 평가했다. 귀주대첩으로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내다 그 후 강감찬은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후 현종은 병을 핑계로 거란의 친조 요구를 거절하고 마침내 1014년 9월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거란의 공격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고려는 거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척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빈틈없는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고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고려 역시 거란의 대규모 침입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이 20만 군대를 지휘한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나아가 기병 1만 여명을 복병으로 배치해 놓고, 흥화진 앞을 흐르던 하천을 소가죽으로 막았다. 그런 다음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 보내고, 복병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흥화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배압은 퇴각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고려군의 총 지휘를 맡은 강감찬은 별동대를 보내 거란군을 정신없이 계속 공격하였다. 강감찬의 공격으로 꽤 많은 병사들이 죽었음에도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다. 결국 1019년 1월 거란군은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까지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개경을 코 앞에 둔 소배압은 강감찬의 계속되는 별동대 공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하여 후퇴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퇴각을 시작하자 강감찬은 전군을 이끌고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각하는 거란군이 강감찬과 만난 곳이 바로 ‘귀주’다. 귀주에서 강감찬의 고려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여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 당시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거란군은 단지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며,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강감찬의 지휘로 거란군의 침략 야욕을 분쇄해 버린 이 날의 전투는 우리 역사상 귀주대첩으로 알려졌다. 승장 강감찬은 당당히 개경으로 개선했다. 현종은 친히 파역까지 나가서 강감찬을 맞이하고, 금화(金花) 8가지를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승리를 이룬 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다 3차 거란의 침입이 종전된 이듬해,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 70세가 넘는 고령에 전쟁터를 다녀왔으니 건강을 해친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강감찬에게 지팡이와 방석을 내려주며 3일에 한번만 출근하도록 명하였다. 강감찬은 1030년 개경의 주위에 성을 쌓으라는 간언을 올렸고, 1031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려사에서는 강감찬에 대해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사람들이 평소에는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다. 큰 그릇을 만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큰 인물도 오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 바로 강감찬이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고려시대에 36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침입이라는 큰 위기가 발생하자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지금도 노인이라고 할 수 있는 70세부터 강감찬은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 강감찬은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지만, 거란 침입 때에는 무장으로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는 70대에 거란의 기병을 막는 전술을 연구했을 정도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활기차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이성의 역할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 활동을 중단하면 인간은 인간다운 생명의 끈을 스스로 끊어버리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이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강감찬처럼 진정한 노년을 누릴 권리가 있다. 글 김대근·NH농협은행 은퇴연구소 선임연구원

여행

청계천의 북쪽, 경복궁의 서쪽 – 북촌과 서촌

서울은 정도(定都) 600년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하고 유서 깊은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어서 여행지로서도 손색이 없다. 교통이 편리하고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것도 여행지로서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특히 서울의 전통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전하고 있는 북촌이나, 최근 서울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서촌은 서울의 역사와 함께 생활변천사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답사코스가 된다. 가장 오래된 서울, 북촌 가회동 31번지길에서 내려다본 북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와집 지붕들이 금방이라도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놓을 듯하다. 멀리 보이는 초록박공집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이준구가옥으로, 1991년 서울시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서촌의 한옥들은 1910년대 이후 주택계획에 의해 지어진 이른바 개량한옥이 대부분이다. 홍건익가옥은 자연지형을 살려 건물을 앉힌 실용적 구조와 함께 서울에 남아있는 한옥 중 보기 드문 규모로 근대시기 한옥의 특징을 보여 주는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북촌 조망의 압권은 단연 가회동 31번지길(북촌로 11길)에서 보는 풍경이다. 조붓한 골목길로 올라서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와집 지붕들이 잇달아 펼쳐지며 금방이라도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듯하다. 그 기와지붕 위로 눈이라도 내려 덮이면 마을은 단숨에 수묵화가 된다. 하지만 이제 그 조망을 즐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던 주민들이 담장을 높이 올리고 철조망까지 쳐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북촌한옥마을의 현실을 잘 드러낸다. 엄연히 실제 사람이 사는 거주지역이기 때문에 정주권과 주거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일부 ‘과도관광’으로 인한 사생활 침해가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종로구에서는 북촌이 관광지이기 이전에 주민들의 생활공간임을 알리면서 ‘정숙관광’을 유도하고 있지만 뜻대로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북촌은 종로구 재동·가회동·삼청동 등에 걸쳐 있던 마을로,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에 있는 동네인 데서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 예로부터 조선시대 왕족이나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데, 황현의 에는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북촌이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데 비해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은 소위 ‘남산골샌님’이라 불리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과 하급관리, 상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촌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면서 조선인 중심 거주지역으로서의 ‘북촌’과 일본인 중심의 ‘남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원래 이 지역에는 솟을대문이 있는 집 몇 채와 30여 호의 한옥만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말부터 생활한옥이 많이 지어졌으며, 1992년 한옥보존지구에서 해제되고 1994년 고도제한이 풀리면서 일반 건물들도 많이 들어섰다. 현재 2,300여 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 1,400여 동이 한옥이고 나머지는 일반 건물이다. 한옥의 대부분이 팔각지붕을 한 기와집이며, 구조는 평면이 ‘ㄷ’이나 ‘ㅁ’ 모양으로 된 도시형 한옥이 많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마당이 노출된 전통한옥과 달리 길에서 보면 높은 대문과 방으로 막혀 집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2000년대 들어 개축하지 않은 한옥들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한옥 개축을 장려하는 터에 최근 지은 한옥은 전형적인 도시한옥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서울을 찾는 여행객이라면 북촌의 게스트하우스 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제격이다. 전통 부적과 민화를 전시하고 체험하는 가회박물관을 시작으로 자수박물관, 매듭박물관 등 한국 전통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장이 풍부하고, 오래된 식당과 현대적 카페테리아 공간이 함께하는 삼청동 거리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멋과 맛의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대표적 전통문화 관광지인 인사동과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광화문과 청계천 등 서울을 상징하는 곳들이 도보로 찾아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여 가장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서울여행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전통한옥을 활용한 북촌문화센터에서는 외국인을 포함한 방문자들을 위한 여행정보와 문화해설사의 북촌 안내가이드 프로그램 운영 등 다양한 여행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예로부터 많은 문인·예술가들이 거주해온 서촌 북촌전망대에서 바라본 경복궁 일원. 북촌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북촌전망대는 사설시설로 유료이며, 입장료를 지불하면 음료 한 가지를 제공한다. 서촌을 비롯한 경복궁 일원에서 한복차림을 만나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한복 착용의 경우 경복궁 입장료가 면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한복을 착용한다. 젊은 세대를 비롯하여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한복과 친숙해질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통인시장은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불러 모으고 있다. 그 중 ‘도시락 카페’ 마켓은 큰 인기를 끌어 시장 곳곳이 도시락을 든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필운동의 홍건익가옥은 서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옛집이다. 조선시대 왕족과 사대부 집권세력의 주 거주지던 북촌과는 달리 서촌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인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다. 1930년대 이 집을 지은 홍건익도 사대부가 아닌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홍건익 이전 토지 소유자 중 한 명인 고주는 역관이었다. 1914년 에는 ‘필운대에 사는 고주 씨가 빈민을 구제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는 위항문학(委巷文學, 18세기 이후 중인계급을 중심으로 발달한 문학)의 일파인 ‘육교시사(六橋詩社)’에 참여하기도 했다. ‘서촌’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서촌’이라 불린 곳은 서소문 일대여서 이곳을 ‘서촌’이라고 부를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역사학자 및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있어왔다. 이에 종로구 지명위원회는 2013년 이 지구의 공식 명칭을 '세종마을'로 의결했다. 그러나 2017년 한옥체험관을 '상촌재'라 명명하며 이 지구의 옛 이름이 '상촌(웃대)'이라고 밝혀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웃대'는 청계천 상류 전체를 뜻하는 지명이어서 이곳만을 가리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어쨌든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의 사이의 청운효자동, 사직동 일대를 일컫는 서촌은 근래 북촌에 버금가는 전통마을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동안 청와대가 인접한 탓에 개발의 혜택을 보지 못하다가 1990년대 말 건축규제가 완화되면서 빌라가 많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최근 다시 한옥 보존의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북촌이나 인사동과 같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전통마을로서의 역사성에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 통인시장의 ‘도시락 카페’ 마켓 등이 유명세를 타면서 새로운 도시관광지로 떠오르고 있지만, 반면 과도한 상업화와 젠트리피케이션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시대 위항문학의 중심이기도 했던 서촌에는 그 연유 때문인지 예로부터 많은 문인·예술가들이 거주해왔다.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이 서촌 주민이었다. 박노수 화백이 살던 집은 2013년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특히 ‘이상의 집’은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처음 보존재산으로 매입해 문화공간으로 개방한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비록 원래 이상이 살던 집은 헐리고 필지 일부에 새로 지은 집으로 밝혀져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가 해제하는 소동을 빚기는 했지만. ‘이상의 집’을 지나 누각길을 따라 걷다보면 옥인부동산 안쪽 골목에서 대오서점을 만난다. 1951년에 개점한 헌책방으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알려져 있다. 서점의 이름은 주인장 조대식·권오남 부부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부부가 평생 이 작은 책방을 운영하면서 자식교육을 다 시켰다고 하니 책방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 자켓 촬지, 2013년 TV드라마 ‘상어’의 촬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가게를 이어받은 다섯째 딸에 의해 헌책방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한 채 리모델링하여 북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서촌의 맛집골목으로 유명한 통인시장은 1941년 일제에 의해 효자동 일대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처음 개설된 공설시장이었다. 당연히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생활편의를 제공하려는 목적이 우선적’이었다. 개설 당시에는 지금의 통인시장 입구 북쪽 효자아파트 자리에 위치해 있었지만, 단층이 낡고 비좁아 1960년 후반 5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현재 통인시장에서는 시장상인들이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정성이 가득 담긴 여러 가지 반찬으로 든든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도시락카페 통(通)’을 운영하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시장에서 개당 500원인 엽전을 구입하고, 이때 함께 주는 빈 도시락을 들고 시장 안을 돌아다니며 가맹점에서 엽전을 내고 반찬을 산다. 시장 전체가 거대한 ‘한식 뷔페’인 셈이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올백플랜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