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책을 어루만지면 – 경의선책거리 산책
호학군주(好學君主) 정조는 유능한 젊은 학자를 선발해 그들을 교육하고 학문에 정진케 하고자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했다. 하지만 스스로는 바쁜 정무로 인해 독서할 시간이 부족하자, 당대 최고의 화원들에게 책가도(冊架圖, 책과 책장 등을 그린 그림)를 그리도록 해 그 아쉬움을 대신하고자 했다.
오죽하면 어좌 뒤에 전통적으로 세웠던 일월오봉도를 치우고 책가도 병풍을 세울 정도였다. 이는 조선 건국 때부터 이어져온 관례를 깨버린, ‘책벌레’ 정조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책방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
Tip. 과거로의 시간여행, 경춘선숲길
경의선숲길과 함께 옛 경춘선 구간에 조성된 경춘선숲길 또한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2013년 첫 삽을 뜬 경춘선숲길은 7년 만인 2019년 그동안 행복주택 건설공사로 중간이 끊어진 채 미완으로 남아 있던 마지막 0.4km 구간을 개통하면서 총 6㎞ 전 구간을 막힘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노원구 월계동의 경춘선숲길은 2010년 12월 열차 운행이 중단된 이후 쓰레기 무단 투기, 무허가 건물 난립 등으로 방치되었던 경춘선 폐선 부지를 서울시가 도시 재생사업을 통해 녹색의 선형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옛 기찻길과 구조물을 보존해 철길의 흔적은 살리면서 주변에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숲길로 조성했다. 경춘철교를 시작으로 구리시 경계까지 숲길을 따라 걸으면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경춘선숲길은 구간별로 각각의 특성과 매력을 갖고 있다. 1단계 구간은 단독주택 밀집지역으로 허름한 주택이 카페로 변신, 주민들의 만남과 소통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2단계 구간은 시민이 직접 가꾼 텃밭과 살구나무, 앵두나무 등 유실수와 향토수종 등 다양한 수목으로 정원이 조성되었다. 3단계 구간은 옛 화랑대역 역사와 함께 한적하게 산책할 수 있는 숲속 철길이다. 특히 등록문화재 제300호인 화랑대역 역사는 이제는 추억이 된 무궁화호 경춘선 노선도, 승무원 제복, 차표 등 옛 간이역 풍경을 재현해놓은 전시공간으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적격이다.
오늘 당신과 함께할 책은
‘문화산책’ 부스는 지금 막 휘어진 길을 빠져나오는 열차 모양이다.
정조시대의 ‘책가도 문화’를 현대적 의미로 되살린 곳이 바로 경의선책거리다. 시민들에게 책을 통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제공하고자 2016년 마포구에서 경의선 폐선부지인 홍대복합역사 일원에 책 테마 거리를 조성했다. 출판사와 서점들이 밀집해 있는 마포구에 책거리가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 거리를 찾는 시민들이 ‘세상에 나온 책 한 권의 위대한 가치를 통해 건강한 삶의 지혜를 함께 나누고 꿈을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시작은 지하철 홍대입구역 6번 출구다. 지하에서 빠져나와 잠시 되돌아가면 ‘경의선책거리’라고 쓰인 조형물이 보인다. 이곳에서 출발해 와우고가차도 아래 구역까지 이어지는 길이 경의선책거리다.
‘땡땡거리’ 앞에 세워진 경의선 안내판. 다른 안내판과 마찬가지로 ‘기타 치는 남자’와 ‘책 읽는 여자’가 걸터 앉아 있다.
약 250m에 걸쳐 이어지는 길에는 다양한 주제의 책을 전시하고 판매도 하는 책방과 문화공간이 있다. 마치 열차 차량처럼 생긴 직육면체의 부스들은 모두 각각의 주제를 갖고 운영되는 공간들이다.
공간산책, 여행산책, 예술산책, 아동산책, 인문산책, 문학산책, 테마산책, 문화산책, 창작산책, 미래산책 등이 그것들이다. 각 공간에는 주제에 맞는 책을 전시하고 판매하거나, 특정 책을 주제로 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또한 요일별로 주제를 달리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월요일은 프로그램 준비, 화요일은 인문학, 수요일은 저자와의 만남, 목요일은 여행, 금요일은 문학, 토요일은 어린이와 가족, 일요일은 북콘서트와 공연 등이 열린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리 안내판 위에 걸터앉아 있는 ‘기타치는 남자’와 ‘책 읽는 여자’ 조형물. 음악과 미술로 대표되는 이른바 ‘홍대문화’와 책거리의 만남이다. ‘시민이 사랑하는 책 100선’이 새겨진 조형물, 고가다리 아래 옛 철도역을 재현한 작은 역사도 눈길을 끈다. 따사로운 봄날엔 역사 벤치에 앉아 책 한 권 읽다 돌아가도 좋을 법하다. 그것이 따분하다면 주변에 산재한 카페나 주점에서 잠시 파적하면 될 일. 역사와 마주한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늘 당신과 함께할 책은 무엇입니까?’
꽃피는 책거리는 아름답다
와우고가차도 아래 조성된 ‘책거리역’. 경의선에 기차가 다닐 때 세교리역과 서강역 사이에 자리한 이곳을 책거리역으로 꾸몄다.
와우고가에서 바라본 경의선책거리. 옛 철로를 걷어낸 자리에 녹지공간을 조성하고 정조시대의 ‘책가도’ 정신을 입혔다.
책거리의 끝은 ‘땡땡거리’로 이어진다. 옛 철길을 따라 기차가 지나갈 때면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지고 ‘땡땡’ 소리가 울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의선은 1906년 개통된 용산과 신의주를 잇는 철길로, 일제강점기 시절까지만 해도 남북을 오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전쟁과 분단을 겪으며 오랜 세월 운행이 중단되었으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복원사업을 시작해 2009년 서울역에서 문산역까지 광역전철이 개통된다. 이때 용산~가좌를 연결하는 6.3㎞의 용산선 구간을 지하화하면서 지상에 경의선숲 길을 만들었다.
경의선책거리의 끝인 와우고가에서 홍익대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금세 산울림소극장이 나온다. 연극인들 사이에서 이른바 ‘연극교실’로 불리는 유서 깊은 연극공연장이다. 산울림소극장을 지나 맞은편 언덕길을 오르면 와우공원을 만날 수 있다. 와우산 자락에 자리한 와우공원은 생각보다 아름다운 공원이지만, 어지간한 연배에게라면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기억되는 곳이다.
1970년 4월 8일, 창전2동 와우산 기슭에 위치했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대연각 화재사건과 더불어 1970년대 건물 관련 참사로 쌍벽을 이루는 사고였으며, 건국 이래 발생한 각종 참사 중 안전불감증으로 인해 일어난 첫 대형 참사이기도 하다. 새로 지은아파트가 산 아래로 넘어지듯이 무너져 내리면서 33명이 죽고40명이 부상당하는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와우공원을 돌아다시 와우고가 위로 올라서면 경의선책거리가 한눈에 펼쳐진다. 꽃피는 책거리는 아름답다. 그 거리를 걷는 사람도 아름답다. 꽃보다 아름답다. 이윽고 해가 지면 하나둘 켜지는 도시의 불빛 또한 아름다우리라. 집에 돌아가 다시 책을 펼쳐야겠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