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건강

건강 위협하는 온열질환 – 현명하게 ‘열’ 관리하자

어느덧 여름이 코앞까지 왔다. 여름은 뜨거운 ‘열’로 인한 다양한 질환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로워지지 않는 법. 건강한 여름을 나기 위한 현명한 ‘열’ 관리법에 대해 알아본다. 온열질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더운 여름철 뜨거운 햇볕 아래에 오래 서 있거나 장시간 활동하기보다는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면서 그늘을 찾아 휴식 시간을 늘리는 것이 좋다. 낮이 길어지고, 폭염과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는 온열질환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온열질환은 말 그대로 ‘열’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이다. 일사병·열사병을 포함해 열실신·열경련·열탈진 등 비교적 가벼운 질환부터 중증 질환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질환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가 물놀이 중 겪을 수 있는 자외선으로 인한 일광화상도 온열질환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더운 여름 고온의 환경에 오랫동안 몸이 노출돼 체온이 올라가면, 몸에서는 상승된 체온을 조절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일어난다. 신체 끝부분까지 가는 혈액량을 늘려 열기를 발산하고 땀을 흘려 체온을 낮추려고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몸은 많은 양의 수분과 염분을 잃게 된다. 때문에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심한 갈증과 무기력·어지럼증이 발생하고, 온열질환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엄연히 다른 일사병과 열사병 가장 대표적인 온열질환은 일사병과 열사병일 것이다. 명칭이 비슷해 헷갈리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른 질환이다. 일사병과 열사병 모두 고온에 장시간 노출될 경우 발생하지만 일사병이 열사병에 비해 경증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일사병은 휴식을 취하면 비교적 쉽게 회복되는 반면, 열사병은 제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회복이 어려울 수도 있다. 또한 일사병 단계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열사병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질환은 세부 증상을 통해 구분이 가능하다. 우선 일사병은 심부체온이 37∼40℃도까지 오르고, 약간의 어지러움과 정신 혼란이 있지만 의식은 뚜렷하다. 하지만 열사병으로 발전하면 심부체온이 40℃를 넘겨 중추신경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정신이 혼란한 상태가 지속되고 말이 어눌해지거나 호흡이 이상하고 발작이나 경련·의식불명이 나타날 수도 있다. 급성신부전과 심인성쇼크·간기능부전을 야기하고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온열질환자 발생시 대처법은? 그렇다면 온열질환자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빠르게 체온을 낮추는 일이다. 환자를 시원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옷을 벗긴 뒤, 찬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내거나 분무기로 물을 뿌려 최대한 체온을 내려야 한다. 부채질이나 선풍기를 이용해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도 좋다. 의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찬물이나 음료수를 먹여 수분을 보충해주되 의식이 없다면 절대 먹이지 말아야 한다. 자칫 물이나 음료수가 기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의식이 없거나 어지러움을 심하게 느낄 만큼 위중하다면 지체하지 말고 바로 119에 신고한 뒤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온열질환자가 병원으로 이송되면 고온과 고열 환경 노출 여부, 의식상태, 생체 징후, 심부체온을 먼저 확인한다. 만약 열사병이 의심되면 저혈압이나 부정맥·혈액응고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통해 다발성 장기손상 여부를 추가 확인한다. 또한 환자의 체온 조절에 중점을 두고 치료를 하는데, 심부온도를 계속 관찰하고 수액을 투여하면서 체온을 낮추는 데에 집중한다. 의식이 없는 경우에는 기도 유지, 호흡 보조를 함께 시행하고 저혈압이 나타나면 혈압을 상승시키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위세척을 하거나 심부전·간부전 치료를 병행한다. 온열질환은 예방이 중요 어린이나 노약자라면 온열질환에 보다 더 주의해야 한다. 건강한 일반 성인보다 체온조절 기능이 약하기 때문이다. 호흡기·뇌혈관 및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거나 정신과 약물치료를 받는 환자의 경우에도 신체적응 능력이 낮아 폭염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한편 온열질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더운 여름철 뜨거운 햇볕 아래에 오래서 있거나 장시간 활동하기보다는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면서 그늘을 찾아 휴식 시간을 늘리는 것이 좋다. 또한 기온이 너무 높은 날에는 최대한 야외활동을 자제할 필요도 있다. 글 이기헌(분당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인물

61세에 홍산대첩으로 고려를 구한 최영

혼란스럽던 고려 말, 최영은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 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군이자 재상이었다. 그가 홍산대첩으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구했을 때의 나이는 61세였다. 30대 중반에 중앙 정계에 진출 최영은 1316년 고려 말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영의 가문은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운 철원 최씨 가문으로 고려의 유력 가문 중 하나였다. 최영은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혀 무장의 길을 걸었다. 최영은 관직에 늦게 발을 들인 편이었다. 30대 중반이 되고서야 중앙 정계에 진출했는데 당시로는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 그는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수차례 왜구를 격파하면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그는 1352년 공민왕을 압박하고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그 공로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고려 왕실의 해결사로서의 최영의 일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최영은 원나라에 맞서 싸워 100여 년간 빼앗겼던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의 땅을 되찾는데 공을 세운다.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최영은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그 후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북으로는 홍건적을, 남으로는 왜구를 막아내며 고려를 외침으로부터 지켜낸 대표적인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고려 말기의 왜구 침입은 규모와 피해 면에서 임진왜란에 비견할 정도였는데, 무려 수백 차례를 쳐들어왔다. 최영은 남부지방 해안에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하여 왜구들의 공포 대상이 되었다. 61세에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또한 북쪽에서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적은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의 지배를 타도하고자 일어난 농민 반란세력으로 원나라 군대에 밀려 고려에까지 침략해 들어왔다. 홍건적이 국경을 넘어와 서경까지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쳤고, 1361년에는 개경까지 점령한 홍건적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최영이 국외 세력의 침략에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최영은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막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공민왕을 살해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의 변을 진압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위기를 느낀 원나라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보낸 군사 1만여 명을 의주에서 섬멸하였다. 또한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까지 평정하여 한반도 전역에 그의 활약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1376년에는 왜구가 충청도 일대에서 기승을 부리자 출전을 자원해서 홍산(현재의 부여)에서 직접 선봉에 서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를 홍산대첩이라 하여 이성계의 황산대첩 등과 함께 왜구를 상대로 한 큰 승리로 꼽힌다. 이 승리로 최영은 철원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 사후 조정에서 요직을 겸직하게 되면서 이인임과 함께 우왕을 보좌하게 된다. 그리고 1388년에는 전횡을 일삼던 이인임 일파를 정리하고, 이성계와 함께 재상에 올라 고려 정계에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풀이 나지 않는 무덤의 주인공 1388년 최영은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을 명하였으나 원치 않는 전쟁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결국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것이 바로 고려와 최영의 운명을 완전히 침몰시킨 위화도 회군이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급히 개경에서 이성계의 군대와 싸우려 했으나 이미 대부분의 군사를 이성계에게 내어준 상황에서 최영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최영이 보호하던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유배되었다가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다. 최영이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은 크게 슬퍼했다. 거리의 아이와 부녀자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개경의 상인들은 모두 가게 문을 닫아 이성계 세력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 그는 유언으로 “만약 내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최영의 무덤은 풀이 자라지 않다가 1976년부터 풀이 나기 시작했다. 최영은 40년간 외침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내고, 왕실의 존립을 위해 한 몸을 바쳤다.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패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장군과 재상을 겸했으나 청탁이나 뇌물사건에 휩쓸린 경우도 없었다. 그리고 최영이 죽고 얼마 후 고려의 운명도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만큼 인간을 늙게 만드는 것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자극을 통해 인식이 바뀐다. 새로운 자극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지배하는 두뇌가 새로운 작동을 시작한다. 최영의 경우가 그랬다. 고려 말기 외적의 침입과 정치적 혼란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최영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위기가 가져다 준 새로운 상황과 자극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그 결과 그는 노년이 되어서도 정력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과 정신이 늙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최영처럼 노년기에도 정력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미국의사협회가 작성한 연구 보고서에는 노화의 원인 중에서 가장 첫 번째가 바로 ‘늙는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지적을 했다. 보고서는 덧붙여서 ‘마음과 육체에 유해한, 노화에 영향을 주는 것은 시간에 대한 공포’일 뿐, 늙어가는 시간 자체가 아니라고 밝혔다. 신경증적으로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바로 늙는 것의 원인이라는 뜻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어간다. 글 김대근 NH농협은행 All100자문센터 선임연구원

여행

한강은 흐른다 – 유람선을 타고 흐르는 한강

두물머리에서 몸을 합한 북한강과 남한강은 한동안 한강으로 흐르다가 조강 어귀에서 임진강과 만나고, 마침내 강화(江華) 앞바다에서 그 흐름을 다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그 물들은 다시 비가 되어 북한산과 남한산, 백두산과 한라산 그 꼭대기를 적시고, 계곡으로 강으로 흐르고 흘러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우리네 삶도 흐르고 흘러 저문 바다로 돌아간다. 그 순환은 서럽고도 장엄하다. 모든 흐르는 것들은, 모든 저무는 것들은 흐르고 저물며 저마다의 시간을 완성하고, 다시 시작한다. 한강은 길이로 보면 한반도 전체에서 네 번째이지만, 유량과 유역면적에서는 단연 으뜸인 크고 아름다운 강이다.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한강 유역의 역사는 한성백제 시대에 꽃을 피운다. ‘꿈말’ 몽촌토성과 ‘바람드리’ 풍납토성, 석촌동과 방이동의 고분들이 그 흔적들이다. 한동안 그 점유를 놓고 세력쟁투의 본류가 되기도 했던 한강은 조선왕조의 개국과 함께 마침내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 된다. 그러고도 강은 흐르기를 멈추지 않아 ‘끊어진 다리’로 민족의 아픔을 담아내기도 하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드라마까지 펼쳐낸다. 강은 항상 하나로 모두어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흐르면서 둘로 갈라내니 강을 사이에 두고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으로 마주한다. 서울을 강북과 강남으로 가르는 한강은 개발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심사와 신세까지를 갈라내는 모진 물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로지 강의 탓만은 아니다. 강남마저 ‘그냥’ 강남과 ‘진짜’ 강남으로 나누는 그악스러운 이해(利害)가 땅을 가르고, 사람들의 마음마저 갈라낸다. 암사동에서 시작한 한강답사가 행주대교에 이를 때쯤이면 이윽고 날이 저문다. 저문 한강은 내게 말한다. 물이 하나인데 땅이 둘일 수 없다고. 나뉜 것들마다 다시 만나 하나 되게 하라고.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한강유람선 승선기 강 너머 좌로 북한산, 우로 남산의 잔영이 아련하다. 이처럼 도시와 산하를 한눈에 펼쳐 보여주는 강이 또 있을까. 거기에 역사를 담아내고 사람들의 마음까지 비춰내니 영락없는 파노라마 그 자체다. 한강 줄기를 따라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했다. 잠실벌에서 펼쳐진 88올림픽은 ‘한강의 기적’을 세계에 알렸고, 2002년 상암동에서 막을 올린 월드컵은 바야흐로 ‘대한민국 신화’의 탄생이었다. 행주산성의 노을. 서울 한강의 하류인 행주산성쯤에 이르면 강은 도심구간을 뒤로 밀쳐내며 산들의 능선을 잇달아 회복한다. 그곳에서 산의 수직과 강의 수평이 교차하지만 그는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진다. 한강 구석구석을 어지간히도 다녔지만 배를 타고 한강을 흐르기는 처음이다. 그것도 유람선으로. 늘 강 밖에서 강을 향해있던 시선은 처음 강에서 강 밖으로 열린다. 그 시선이 담아내는 풍경은 새롭고도 익숙하다. 그것이 유람이면 어떻고, 항해이면 또 어떠리. 바람은 마냥 삽상하고, 몸마저 거침없이 강물을 헤쳐 나가나니. 시작은 한강 여의도선착장이다. 이랜드크루즈에서 운영하는 한강유람선은 여의도선착장과 잠실선착장 두 곳에서 출발한다. 기본인 스토리크루즈와 달빛크루즈(야경)는 각각 당산철교(여의도)와 성수대교(잠실)를 돌아오는 코스고, 뮤직크루즈와 불꽃크루즈는 각기 출발 선착장에서 반포대교(무지개분수쇼)를 돌아 회항한다. 여의도에서만 운항하는 런치크루즈와 디너크루즈도 있다. 요금은 15,000원(스토리크루즈)에서 99,000원(디너크루즈 창가석)까지다. 선상 콘텐츠는 별거 없다. 갈매기 먹이주기와 선내에서의 간단한 공연이 전부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40분을 돌아오는 코스만으로는 한강을 둘러보기에도(그것도 극히 일부만) 급급한 지경이다. 그마저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거의 갈매기 먹이주기로 소모한다. 예전 석모도 뱃길을 끈질기게 따라붙던 ‘거지갈매기’들의 명성은 이제 한강유람선에서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어김없이 따라붙을 그들을 위해 미리 새우깡이나 말린 멸치 같은 먹이를 준비한다. 먹이를 겨냥한 그들의 몸짓은 좀체 실수하는 법이 없다. 유람객의 쭉 뻗은 손 주위를 선회하다가 거리가 맞다 싶으면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채지만 사람의 손가락을 무는 일은 거의 없다. 마치 시혜자에게 조금의 결례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설령 먹이를 낚아채다 떨어뜨린다 해도 수면 위에는 이미 2선 수비들이 포진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좀 더 게으른 놈들일 게다. 한강의 갈매기들은 이제 비상을 위한 근육마저 퇴화한 채 오직 걸식만을 위해 가뜩이나 비만한 몸통 통째로 떠다닌다. 그렇다고 갈매기는 그리 만만하게만 볼 새는 아니다. 리차드 바크의 에서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고 일갈하고, 압구정(狎鷗亭)은 이름 그대로 한강을 거슬러 내륙 깊숙이 날아드는 갈매기들의 놀이터였다. 그 압구정에서 한명회는 갈매기들과 함께 한 시대를 노닐었고, 또 다른 임진강가 반구정(伴鷗亭)에서는 황희 정승이 갈매기를 벗하여 노년을 보냈다. “왜 그러니, 존? 왜 그래? 여느 새들처럼 사는 게 왜 그리 어려운 게냐, 존? 저공비행은 펠리컨이나 알바트로스에게 맡기면 안 되겠니? 왜 먹지 않는 게냐? 얘야, 비쩍 마른 것 좀 봐라!” “비쩍 말라도 상관없어요, 엄마. 저는 공중에서 무얼 할 수 있고, 무얼 할 수 없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그냥 알고 싶어요.” - 리처드 바크 중에서 1900년 한강철교가 처음 개통된 이래 한강에는 32개의 다리가 놓였다(33번째 다리는 상암동과 염창동을 잇는 월드컵대교로 2021년 완공 예정이다). 그 다리들은 겉으로 강이 갈라놓은 땅들을 잇고 다닌다. 하지만 마포대교 건너의 여의도가 보여주듯 강 건너 역시 공룡 같은 세속도시의 수직구조물들로 가득하다. 다리는 강을 건너며 짐짓 수평을 흉내 내지만 그 수평은 수직과 아무 다를 바가 없다. 자연은 선이 아니라 흐름인 것을. 배는 절두산성지가 보이는 당산철교쯤에서 회항한다. 그러고 보니 한강 가에는 유독 천주교 성지가 여러 곳이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숱한 신도들이 피 흘린 새남터성지와 함께,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목이 잘려나간 절두산성지가 한강을 바라보고 있고, 용산의 당고개성지나 왜고개성지도 한강에서 그리 멀지 않다. 절두산성지 가까이 양화진에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과 함께 순교자기념관이 있다. 그 수난의 장소들은 비단 천주교 신앙뿐만 아니라 고스란히 우리 역사의 수난과도 맞닿아 있다. 새남터 모래밭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의 충절이 피로 물든 자리이며, 또 역모에 몰린 남이 장군의 원혼이 스러져간 곳이기도 하다. 양화진은 또 어떤가. 이른바 병인양요 사건으로 외세와 첨예하게 부딪친 역사적 현장이며, 상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가 청나라와 정부에 의해 능지처참당한 곳이기도 했다. 그처럼 한강은 역사의 숱한 피와 눈물을 씻어 내리며 묵묵히 흘러왔으니. 한 가족이 배 난간에 기대어 만경창파 푸른 물결을 바라본다. 그 푸른 물결에 온갖 시름마저 다 떠내려갔으면. 그리하여 순풍에 돛 단 듯 어디론가, 어디로든 흘러흘러 갔으면. 그곳이 어디이든 강물에 기대는 사람들의 바람은 한결같고, 강을 바라보는 마음 또한 동서가 다르지 않으리라. 글 유성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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