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건강

치매가 두려운 이유 “무서워 말고 치매안심센터 방문하세요”

혹시 내가 치매라면? 치매에 걸려 사랑하는 가족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처럼 치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앞선다면 조기 검사를 통한 정확한 진단으로 이를 해소할 수 있다. 치매는 그저 무방비로 맞이할 수 밖에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예방과 관리가 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치매를 두려워한다. 치매에 걸려 사랑하는 가족들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까 봐서다. 반대로 사랑하는 부모나 가족이 치매에 걸려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걱정도 크다. 이렇게 치매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두려운 존재다. 한국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환 1순위가 ‘암’이 아닌 ‘치매’가 된지도 오래다. 우리는 왜 치매를 두려워할까? 많은 사람들이 치매를 두려워하게 된 시점은 2000년대 이후부터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노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연령이 높아질수록 발병 위험이 높아지는 치매의 유병률 또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변에서도 흔하게 치매 환자와 그 가족들을 만나고, 어렵지 않게 치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치매에 대한 정보의 확산도 우리가 치매를 두려워하게 된 데 영향을 끼쳤다. 과거에는 치매 증상을 단순히 고령화에 따른, 다시 말해 노인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변화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치매에 대한 정보가 증가하면서 이것이 나이 듦에 따른 변화라기보다 치매라는 질병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이 같은 변화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치매 선별 평가라든가 조기 진단을 통해 치료와 관리를 받게 됐다. 아직은 치매가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치매를 유발할 수 있는 위험 요인을 일찍부터 관리하고, 다양한 예방 습관들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하지만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면 치매 진단이나 치료 시점을 놓쳐버린 경우도 적지 않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치매 진단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에는 병이 꽤 진행된 뒤에야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많은 탓이다. 평가와 진단이 늦어 적절한 치료와 관리시기를 놓친 환자들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경도 치매부터 관리하는 게 중요 치매에 대한 공포심이 큰 사람들은 보통 치매라는 질환을 얘기할 때 증상이 아주 심한 중증 환자만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치매는 중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도·중등도·중증 등 3단계로 나뉜다. 경도 치매는 치매 환자의 약 60%를 차지한다. 이들은 기억력 등 인지 기능의 저하로 일상생활의 어느 정도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판단력은 정상이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은 아직 혼자서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인이 봤을 때 경도 환자들은 치매 환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전문가의 평가와 객관적인 신경인지검사를 통해야만 진단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중등도 치매는 치매 환자의 약 25%를 차지한다. 판단력이 떨어져 사회 활동에 어려움도 생기지만 과거의 일은 여전히 기억할 수 있는 수준이다. 스스로 위생을 챙기는 것과 간단한 집안일 정도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치매 환자의 약 15%를 차지하는 중증 치매는 최근과 과거의 일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며, 대부분의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하루 종일 돌봄이 필요한 수준이다. 비율로 따져보았을 때 이들은 치매 환자 7명 중 1명에 불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흔히 치매라고 했을 때 이러한 중증 환자만을 떠올리기에 두려움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하지만 치매 환자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경도 환자로, 대부분의 환자들이 발병 후 경도 단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 슬기롭게 관리한다면 발병 전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지인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도 충분히 가능하다. 내가 만나본 환자들 중에는 치매 진단을 받았다 하더라도 낙심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족들과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도 많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치매 환자 가족들의 부담도 크게 줄었다. 과거에는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이 가족들만의 책임이었다면, 최근에는 국가가 주·야간보호센터, 방문요양서비스 등 다양한 장기요양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매에 걸리면 나와 가족 모두가 힘들어질 거라고 미리부터 낙담할 필요가 없다. 치매가 두려워 병원 방문과 검사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치매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예방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아직까지 검사를 받아본 적이 없다면 더 늦기 전에 보건소 혹은 치매안심센터를 방문해 검사를 받고, 적극적으로 예방하고 관리하면서 보다 행복한 노후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배종빈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자료제공 〈전원생활〉)

인터뷰

“귀한 인생, 포기하지 말고 기죽지 말고 살자구요”

요즘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개그계의 맏언니’ 팽현숙(56). 그녀는 요즘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알뜰하고 치열하게 살고 있다. JTBC 예능 프로그램 〈1호가 될 순 없어〉를 비롯해 각종 방송 프로그램과 홈쇼핑 출연, 강연과 사업, 학업 등을 병행하느라 주 7일 내내 풀가동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피곤한 기색 없이 활기가 넘쳤다. “10년 넘게 전국 방방곡곡 강연을 다니면서 사업 노하우를 나누며 기적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요. 어떤 팬은 전화로 울면서 속내를 털어놓기도 하고, 어느 분은 ‘언니, 보고 싶다’면서 깔깔거리며 웃어요. 남편 최양락 씨는 저더러 무슨 교주 같다고 하더군요.(웃음)” 실패 딛고 일어난 ‘여자 백종원’...거침없는 화법으로 공감대 팽현숙이 이처럼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것은 성공한 외식 사업 CEO로서 사업 노하우를 나눌 뿐만 아니라 솔직하고 거침없는 화법으로 중장년 팬들에게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여자 백종원’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도 한다. “주부들이 결혼하고 출산하고, 애들 키워놓고 나면 우울증이 오곤 하잖아요. 재취업을 마음먹고 거울을 보니 어느덧 중년에 모든 게 내 맘 같지 않죠. 회사에 이력서를 내기도 힘들고 특별한 재주나 자격증도 없으니 자존감도 떨어지고... 저는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요.” 그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레스토랑, 카페, 한정식, 치킨집, 맥줏집, 옷 가게 등 다양한 업종에서 실패했지만, 결국 오뚝이처럼 일어나 성공을 일궜기 때문이다. 팽현숙은 지난 2006년 순댓국 본점을 오픈해 사업에 성공했고, 최근에는 반찬가게를 오픈해 외식 사업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는 오늘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 성공의 비결이요? 자존심 내려놓고 직접 부딪쳐 보세요 그에게 성공적인 사업 수완의 비결을 물었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똑부러진 답이 돌아왔다. “친정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망하는 이유에 대해 잘 연구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사장이 되려고 했더라고요. 외식 사업은 10명 중 1명이 성공할까 말까 한 어려운 사업이에요. 사장이 종업원이 되고, 주방장이 되어야 성공해요. 저는 늘 강연에서 이렇게 말해요. 진짜 성공하고 싶으면 자존심 다 내려놓고 미용실이건 빵집이건 분식집이건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번 뛰어보라고요.” 자신도 실제로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팽현숙은 “두세 달 일을 해보면 그 집의 성공 비법을 대충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인테리어비, 재료비, 부가세, 인건비, 월세 등이 얼마가 나가고 하루 매출이 얼마인지를 파악하면 자신의 도전 여부에 대해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만큼 외식사업은 꼼꼼히 따져보고 도전해야지 무작정 뛰어들었다가는 망하기 쉽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명퇴(명예퇴직)하면 보통 치킨집을 많이들 하시는데, 망하는 경우가 태반이잖아요. 사실 주방장 월급이 가장 센데, 본인이 주방장 역할을 하면 300~350만원은 먹고 들어가요. 그래서 내가 닭을 튀길 줄도 알아야 돼요. 부부가 함께 사업에 매달리고, 자식들이 주말에 아르바이트 뛰어줘야 성공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망할 일은 없어요.” 팽현숙은 지금도 손에 늘 붕대를 감고 다닌다. 손은 안 꿰맨 곳이 없는 상처 투성이다. 그는 한식, 양식, 일식, 중식 등 4개의 조리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음식 개발에도 직접 나선다. 이제는 권리금 없는 곳에 들어가서 다 죽은 가게를 살리는 것이 자신의 특기가 되었다면서 환하게 웃는 팽현숙. 쇼호스트가 아닌 사업가 마인드로 접근한다는 그는 홈쇼핑에 출연해 20회 연속 매진을 기록하는 등 홈쇼핑계에서도 ‘귀하신 몸’이다. “저는 어떤 홈쇼핑이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제가 그 제품의 회사 사장이라는 생각으로 방송에 임해요. 저는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똑똑하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사업을 열번 이상 망했겠죠. 하지만 저는 계속 도전해요. 누군가 사업을 성공했다고 하면 그 사람을 나의 롤모델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해요." 아내의 열정적 도전에 남편 최양락도 변해 팽현숙은 현재 대기업과 손잡고 해외로 수출할 음식 사업을 개발 중이다. 그는 "외화벌이를 해서 우리나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꿈이다. 전 세계에 깜짝 놀랄 음식을 선보일 것"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아내의 열정적인 도전을 옆에서 지켜본 남편 최양락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말 고집 센 남편의 자세도 완전히 변했어요. 이제는 빨래, 다림질, 쓰레기 분리 수거까지 도맡아 해요. 저는 야외 촬영 나가서 뛰는 장면이 있으면 열번이고 뛰어요. 그래서 한 번 일한 PD나 작가는 저를 꼭 다시 찾아요, 아니 찾게끔 해요. 언젠가 남편이 녹화 시간이 길다고 푸념하길래 제가 옆구리를 팍 찌르면서 그랬죠. '이 나이에 써주는 것도 감사하지!' 나이들수록 겸손해야 한다고요." 그가 말하는 재테크의 기본은 ‘종잣돈'을 모으는 것이다. 저축으로 열심히 종잣돈을 모아 작은 규모의 투자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동산 임대업에 관심을 가지고 재테크 관련 서적을 썼던 그는 ‘카더라 통신’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이 잘 아는 지역에 투자하고, 저평가된 물건지를 고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후 재테크는 무리수를 띄우지 말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저는 지금도 투자의 롤모델을 만들고, 그 사람에 대한 서적을 사서 공부해요.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사회, 경제, 문화를 매일 한두시간씩 인터넷으로 공부하죠. 경제 상식도 결국은 장바구니 물가와 연동돼요." “재테크는 롤모델 만들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 부유하던 집의 가세가 갑자기 기울면서 어린 시절 냉골에서도 살아보고 왕따도 당해보고 인생의 온갖 쓴맛을 다 봤다는 팽현숙. 그래서 그의 몸에는 근검절약이 깊숙이 배어있다. 그는 “홈쇼핑에서 식품을 살 때는 양이 많은 경우 지인들 두세명이 나눠서 공동구매를 하거나 1주일치 장을 미리 보고 가계부를 쓰면 무계획적인 소비를 막을 수 있다”고 알뜰 비법을 귀띔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유는 나이 먹어서 후배들에게 밥 한끼, 커피 한 잔 사는 것을 주저하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다. 그는 “나이 오십까지는 건강관리 잘 하면서 죽기 살기로 열심히 살아보라”고 인생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어려울 때는 나한테 천원짜리 한 장, 밥 한끼 사주는 사람 없어요. 나중에 자존심을 지키려면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노후에 쓸 돈을 조금씩이라도 모아야 돼요. 젊을 때는 얼굴과 몸이 명품이니 욕심을 조금만 줄이세요” “자식에게 기대지말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세요” 동시에 동년배의 팬들에게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제가 살아보니까 나이 오십부터 인생의 참맛을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회사에서는 벌써 뒷방 노인네 취급을 하죠. 나이 오십대가 못해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분야에 대해 잘 아는 경험자죠. 그래서 저는 이런 강의도 하고 싶어요. 나이 먹었다고 기죽지 말고 자식에게 기대지도 말라고. 아르바이트를 뛰더라도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라고요." 그는 죽기 전에 자식에게 10원 한 장 주지 말자는 것이 자신의 지론이라면서 “자식들이 자기의 길을 직접 개척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년 전 가톨릭관동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대학 강단에서 실용영어를 가르치는 딸과 함께 어려운 학생들에게 영어를 공짜로 가르쳐주면서 '더불어 함께 잘 사는 방법'에 대해 연구 중이다. "저도 ‘흙수저' 출신으로 누구보다 힘든 시절을 겪고 고생해봐서, 가난은 희망이 없다고 느껴져요. 그래서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팽현숙의 마지막 꿈은 청평의 자그마한 카페에서 세월을 함께 보낸 사람들과 함께 수다 떨고 소소하게 보내는 것이다. “나이 들었다고 우울하게 살 필요 없잖아요. 노후에 그 카페에서 힘들고 우울증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시간을 보낼 거예요. 팬들이 있는 한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글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erin@seoul.co.kr) 사진 제공 JTBC, SM C&C, KBS

여행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대구 근대골목투어

흔히들 대구를 보수적인 도시라고 한다. 오랜 정치적 배경 때문이겠지만, 대구는 도시가 가진 내력으로 또 다른 의미에서 ‘보수의 가치’를 보여준다. 김원일의 소설 의 무대인 장관동과 종로 일대를 비롯하여 도심 곳곳이 근현대적 삶과 역사의 현장이었다. 또한 대구는 시인 이상화와 화가 이인성의 고향이기도 하고, 한동안 ‘다시 그리기’ 열풍을 불러온 가수 김광석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구시는 이런 도시의 내력을 담은 ‘골목투어’라는 문화관광상품을 내놓아 인기를 끌고 있다. 그중 중구 청라언덕에서 출발하는 ‘근대골목투어’는 봄의 향취와 함께 대구의 깊은 내력을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코스다. 청라언덕의 선교사 주택 청라언덕의 선교사 주택. 이곳에 살던 선교사들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스윗즈주택, 챔니스주택, 블레어주택 등 선교사 주택은 현재 선교박물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학창시절 한 번쯤은 불러봤음직한 노래 이다. 이은상 선생이 가사를 쓰고 박태준 선생이 작곡한 이 노래에 등장하는 ‘청라언덕’은 대구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작은 언덕을 이른다. 이 청라언덕이 ‘대구 근대골목투어’의 출발점이 된다. 대구가 고향인 박태준 선생은 이곳에 있는 계성학교를 다니던 시절, 흠모하던 한 여학생을 그리며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청라’는 ‘푸른 담쟁이’를 뜻한다. 이곳이 ‘청라언덕’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세기 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대구까지 들어와 살던 선교사들의 집이 담쟁이덩굴로 우거졌던 데서 비롯한다. 지금 청라언덕에 남아 있는 선교사 주택은 모두 3채다. 대구제일교회 첨탑 밑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중세풍의 건물들은 도심 속의 이채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언덕을 거닐다보면 마치 유럽 어느 작은 도시의 공원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주택 사이로 ‘은혜의 정원’이라는 선교사 가족묘지까지 있어 더욱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길 계산성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3·1절이 돌아오면 3·1만세운동길에서는 그날을 기리는 퍼포먼스가 펼쳐지곤 한다. 청라언덕에서 계산성당을 향해 가다보면 골목을 지나 긴 계단이 나온다. 이른바 ‘3·1만세운동길’이다.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치리만큼 평범한 골목길이지만 담벽 곳곳에 20세기 초 대구 시내 전경 사진과 함께 3·1운동 당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 이곳이 특별한 곳임을 일깨워준다. 1919년 당시 청라언덕 주변에 있던 계성학교·신명학교·대구고보 등의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 골목을 지나 시내로 집결했다고 전해진다. 대구는 3·1운동과 함께, 그 훨씬 전인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거점이었던 사실을 큰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3·1만세운동길을 빠져나오면 길 건너 계산성당이 보인다. 계산성당은 1899년 로베르 신부가 처음 한옥으로 지었다. 경상도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성당이었다. 하지만 1901년에 화재가 일어나 전소했고, 1902년 프와넬 신부에 의해 설계된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100년이 넘는 전통 때문에 사적 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꿋꿋했던 시인의 옛집 이상화 고택에 이르는 ‘이상화골목길’에서는 계산성당을 배경으로 서있는 시인의 초상벽화를 만날 수 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보다./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에서 계산성당 후문을 빠져나오면 오른쪽에 이상화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저항 시인 이상화는 1939년부터 1943년 숨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한때 도심 재개발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강력한 보존 여론 때문에 겨우 철거를 면할 수 있었다. 고택에는 시인의 꼿꼿했던 성품만큼이나 검소하면서도 정갈한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지만, 새로 복원한 집이라서 옛 맛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못내 아쉽다. 오히려 인근 한 달성공원의 오래된 시비에서 시인의 숨결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된다. 이상화 고택 바로 앞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있다. 이상화·서상돈 고택을 돌아나와 조금만 더 가면 ‘두사충’ 이라고도 불리는 ‘뽕나무골목’이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되어 왔던 명나라 장군으로,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은 조선의 열악한 의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뽕나무를 보급했고, 처음 뽕나무를 심었다는 이곳이 ‘뽕나무골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뽕나무골목은 한약 냄새가 진동하는 약령시골목으로 이어진다. 과 미도다방 진골목의 미도다방. 누군가 타고 온 빨간 자전거가 추억처럼 놓여 있다 이윽고 길은 종로로 접어든다. 서울의 종로처럼 ‘종각이 있던 길’이란 의미로, 예전엔 대구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특히 장관동 일대는 김원일의 소설 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은 한국전쟁 이후 대구를 배경으로 주인공 길남이가 자라가는 과정을 그리는 성장소설로, 90년대 TV 드라마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대구 근대골목투어’의 종점은 ‘진골목’이다. ‘진골목’은 ‘길다’의 사투리 ‘질다’에서 생긴 말로 ‘긴 골목’을 뜻한다. 종로에서 진골목으로 들어서는 길은 안내간판을 유심히 살펴야 찾을 수 있다. 폭 2m안팎의 좁은 골목이기 때문이다. 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예전 대구의 부자와 유명인사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진골목 건너에 있는 미도다방은 한때 대구의 명소였다. 많을 때는 하루 2,000여명이 다방에 들렀을 정도였다지만 지금은 한가한 동네 사랑방 노릇을 하고 있다. 이 다방의 현 마담 정인숙 여사는 40년이 넘게 이곳을 운영해오고 있다. 미도다방 입구에는 대구 출신인 전상렬 시인의 시가 걸려 있다. 종로2가 미도다방에 가면/ 정인숙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 앉아/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꽃시절 나비 이야기도 하고/ 장마철에 꺾인 상처 이야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이야기도 하고//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글 유성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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