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건강

코로나19 백신과 건강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을 종식시킬 최종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는 백신. 지난해 12월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백신접종이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금년 2월 26일부터 개시하여 6월 17일 현재 1차 접종자가 누적 1,400만 명을 돌파하였다. 4가지 코로나19 백신 현재 국내 품목허가를 받은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얀센·화이자·모더나 4가지다. 아스트라제네카와 얀센이 공급하는 백신은 인체에 감염을 일으키지 않는 바이러스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일부 유전자를 집어넣어 세포에 전달함으로써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원리의 바이러스 벡터 백신이다. 화이자와 모더나가 개발해 공급하는 핵산 백신은 체내에서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DNA 정보를 실어 나르는 mRNA(메신저 리보핵산)를 지질로 된 작은 주머니에 감싸 인체에 주입하는 백신이다. mRNA가 전달하는 유전정보에 따라 만들어지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에 항체가 만들어지게 하는 방식이다. 해외 공식자료에 의하면 항체 형성률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평균 70%, 얀센 66%, 화이자 95%, 모더나 94.1%로 보고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백신접종 지침에 따르면, 화이자 백신은 16세 이상에서 1회 접종 후 3주 후에 추가 접종을 하고, 모더나 백신은 18세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1회 접종 후 4주후에 추가 접종을 한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30세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1회 접종 후에 8~12주 후 추가 접종을 하고, 얀센 백신은 30세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단회 접종을 한다. 코로나19 백신접종 전에는 반드시 의사의 예진을 받아야 하며, 코로나19 백신 구성성분에 대해 아나필락시스와 같은 심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난 경우나 1차 코로나19 예방접종 후 아나필락시스와 같은 심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난 경우에는 접종을 피해야 한다. 임신부와 어린이의 경우 백신접종 후 안전성 및 유효성에 대한 임상연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접종이 권고되지 않는다. 37.5℃ 이상의 열이 있는 경우 열이 떨어질 때까지 예방접종을 연기해야 한다. 하지만 만성질환자는 코로나19 감염 시 위험이 크고, 만성질환이 없는 대상자와 비교 시 비슷한 면역반응과 백신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코로나19 예방접종에 금기사항이 없다면 예방접종이 권고된다. 백신접종 예약하려면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요양병원, 요양시설에 있는 입원·입소자와 종사자, 의료기관과 약국에서 일하는 보건의료인, 119 구급대원, 역학조사 요원 등 코로나19 1차 대응 요원, 군인, 60세 이상 노년층 등에 대해 코로나19 백신접종을 실시 해왔다. 6월 17일 코로나19 예방접종대응추진단이 공개한 ‘예방접종 3분기 시행계획’에 따르면, 9월 말까지 전 국민의 70% 이상인 3,600만명의 1차 접종을 목표로 예방접종전문위원회 심의를 거쳐 접종 대상과 일정을 정했다. 7월부터는 고등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교직원, 어린이집·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 교직원 및 돌봄 인력, 그리고 50대에 대해서 코로나19 백신접종을 시작한다. 18~49세 등 40대 이하 연령층은 별도 연령 구분 없이 오는 8월 희망하는 사람부터 사전예약 순서에 따라 접종을 할 예정이다. 코로나19 백신접종 대상이 아닌 사람에게도 접종 기회가 있을 수 있다. 의료기관에서 잔여 백신이 발생하면 예방접종시스템에 당일 잔여 백신량을 등록해 카카오, 네이버 앱을 통해 공개하고 있으므로 네이버·카카오를 통한 신속 예약방식을 사용하면 노쇼(No-show) 백신접종의 기회가 있을 수 있다. 백신접종 시 알아둘 점은 코로나19 예방접종대응추진단에 따르면, 예방접종 후에는 15~30분간 접종기관에 머물러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는지 관찰해야 한다. 이전에 다른 원인, 즉 약·음식·주사행위 등으로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난 경험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30분간 접종기관에서 관찰이 필요하다. 발열·근육통 등의 발생에 대비해 해열진통제인 아세트아미노펜을 준비하여 예방접종 당일 초기 증상부터 바로 사용하고 충분한 휴식과 수분섭취를 해야 한다. 해열진통제 사용에도 전신증상·발열·근육통 등이 2일 이상 지속되거나 호흡곤란, 입술이나 입안의 부종, 두드러기 등의 증상이 발생하면 의료기관을 방문해야 한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매우 드물지만 치명적일 수 있는 혈소판 감소성 혈전증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데, 조기 발견하면 치료가 가능하다. 따라서 접종 후 4주 이내에 호흡곤란, 흉통, 지속적인 복부 통증, 팔다리 부기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거나, 접종 후 심하거나 2일 이상의 지속적인 두통이 발생하며 진통제에 반응하지 않거나 조절되지 않는 경우, 또는 구토를 동반하거나 시야가 흐려지는 경우, 그리고 접종 부위가 아닌 곳에서 멍이나 출혈이 생긴 경우에는 바로 병·의원을 방문해 진찰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화이자 백신이나 모더나 백신을 접종받은 청소년이나 젊은 성인에게서 드물지만 치명적인 심근염과 심낭염이 발생할 수 있는데, 조기 발견하면 치료할 수 있다. 이 부작용은 접종 후 7일 이내에 나타나며, 2차 접종 후 더 흔히 나타난다. 접종 후 흉통, 호흡곤란, 심장이 빠르게 뛰는 느낌이 든다면 바로 병·의원을 방문하여 진찰을 받아야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와 학계에서는 코로나19 백신은 접종의 이익이 위해를 훨씬 상회하므로 접종을 적극 권고하고 있다. 따라서 부작용 발생 여부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모든 이들이 코로나19 예방접종을 꼭 받아야 한다. 물론 집단면역 수준에 도달하는 60~70%의 사람이 면역을 얻을 때 까지는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손 자주 씻기는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글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인물

62세에 KFC를 창업한 할랜드 샌더스

KFC 매장을 방문해 본 사람은 입구에 하얀색 양복을 입은 할아버지 동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전 세계 100여 개국에 매장을 갖고 있는 프라이드 치킨의 대명사인 KFC를 만든 할랜드 샌더스다. 그가 KFC 1호점을 열었을 때의 나이는 62세였다. 인생 전반부는 가난과의 싸움 할랜드 샌더스는 1890년에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12세에 어머니가 재혼을 해서 떠나버렸다. 그 이후 그의 유년기는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12세에 어린 동생들을 위해서 저녁 식사를 만들어야 했는데, 이때부터 요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동생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면서 그의 요리 실력도 점점 늘어갔다. 1907년 17세의 나이에 샌더스는 미 육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40세가 되어 어느 정도 돈이 생기자 전역한다. 전역 후 그 동안 연구해놓은 자신의 요리법을 바탕으로 켄터키 주에 작은 식당을 열어 미국 남부 음식을 요리해 팔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 돼서 샌더스의 식당은 지역에서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의 식당 근처 도로를 대신해서 새로 고속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손님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식당에 화재가 나는 불행을 겪는다. 60세가 되던 해에 결국 식당은 폐업했다. 60세에 새로운 사업을 결심 60세에 남은 재산이라고는 월 105달러의 연금과 낡은 트럭 한 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할랜드 샌더스는 다시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닭튀김 요리법을 파는 일이었다. 샌더스는 튀김 도구를 실은 개조된 트럭을 몰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60세는 여생을 즐길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닭튀김 비법을 팔기 위해서 1,008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퇴짜를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목표를 수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1,009번째 도전 끝에 자신의 닭튀김 비법에 투자할 사람을 찾아냈다. ‘웬디스 버거’의 창립자인 데이브 토마스가 자신의 식당에서 샌더스의 요리법으로 만들어진 치킨을 판매하는 조건으로 샌더스에게 치킨 1조각당 0.04달러의 로열티를 지불하기로 계약을 맺는다. 미국 남부의 가정식에 불과했던 프라이드 치킨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순간이었다. 샌더스가 트럭에 짐을 싣고 도전한지 2년 만에 일이었다. 그 동안 그는 트럭 안에서 잠을 잤고, 아침이면 훗날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하얀색 양복을 다려 입고 투자자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 이후 샌더스는 마침내 KFC 1호점을 탄생시킨다. 이때 샌더스의 나이는 62세였다. KFC가 자리를 잡은 이후 할랜드 샌더스는 자신을 샌더스 대령이라고 칭하며 흰 양복을 입고 KFC의 마스코트를 자처하고, 자선단체를 설립하는 등 왕성히 활동하다가 1980년 90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샌더스가 살아온 인생은 말 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인내’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만약 그가 자신 앞에 닥친 불운을 원망하고 좌절했다면, 1,009번의 인내와 도전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생을 운영한 레스토랑이 사라진 위기에도 샌더스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거기서 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사람들에게 프라이드 치킨 요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나이 들어도 더 빛날 수 있다는 믿음 샌더스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만의 요리법을 팔겠다는 아이디어 덕분에 그는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를 만들 수 있었다. 불운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한 정신력과 낙천적인 세계관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2년 동안 1,008번이나 거절을 당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인내심은 경이로울 정도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거절’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그는 거절을 자신의 인격과 동일시 하지 않았다. 거절이란 단지 자신이 팔고자 하는 닭튀김 요리법의 부족함을 뜻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다. 덕분에 거절을 당할수록 그의 프라이드 치킨은 더욱 맛있어졌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거절을 당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거절을 당하기보다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샌더스는 1,008번이나 거절을 당하면서도 차라리 그 과정을 즐기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이 과정을 탐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프라이드 치킨 요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다는 희망으로 2년을 버텼다. 나이가 들어도 삶의 가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빛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나이 들어도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했다. 글 김대근 NH농협은행 은퇴설계전문위원

여행

방학의 추억 – 괴산호와 산막이옛길

고대하던 방학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외갓집으로 향했다. 몇 번이고 버스를 갈아타고 시골마을에 내리면 키 높은 미루나무가 햇빛에 반짝거리는 한적한 시골길, 그 길 깊숙이 외갓집이 있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버선발로 뛰어나온 할머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고, 마루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는 사이 할아버지는 두레박에 앉혀 우물 속에 담가두었던 수박을 꺼내오셨다. 그뿐이 아니었다. 옥수수며 감자며 ‘자연마켓’에서 건져온 먹거리들로 입질은 쉴 틈이 없었다. 저녁이면 마당 한가운데 멍석이 깔리고, 모깃불 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 무릎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은 그토록 총총했다. 다시 외갓집에 가고 싶다. 여름방학, 그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호수 끝에 섬처럼 떠 있는 마을 청주 인근 산성리와 속리산 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달래강(달천)은 보은과 괴산을 지나 충주 가금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한 오누이의 애틋한 전설을 안고 있는 이 작은 강은 그 이름만큼이나 시골스럽다. 구불구불 흘러내리며 지천으로 올갱이를 키우고, 가끔 뭍으로 올라서는 고추나 마늘밭의 고랑이나 적시기 십상이다. 남한강에 이르기 전에 이 강은 두 번 물막이에 가두어지는데 괴산호에서 한 번, 충주호에서 또 한 번이다. 그 괴산쪽 물막이 괴산호 자락에 갈론마을이 있다. 괴산호는 1957년 괴산수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생겨났다. 괴산수력발전소는 한때 우리나라 최초의 수력발전소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노후한 모습으로 잊혀가고 있다. 수문이 열리지 않을 때면 사람들은 배수갑문 아래까지 들어가, 충청도에서는 ‘올갱이’라 부르는 다슬기를 잡는다. 그 댐 옆으로 호수를 끼고 겨우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길이 나있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비포장의 시골길이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깨끗하게 포장이 되어 있다. 키 큰 미루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5km쯤 깊숙이 들어가면 호수의 끝에 마치 섬처럼 떠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갈론마을. 원래 이름은 ‘갈은(葛隱)’인데 ‘칡뿌리를 캐 먹으며 은둔한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이곳은 은둔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의 은둔선비들, 박해를 피해온 천주교도들, 숱한 시인묵객들이 이곳에서 은둔의 세월을 지내고 갔다. ‘갈은구곡(葛隱九曲)’이라 불리는 계곡에는 구비마다 ‘갈은동문, 갈천정, 강선대, 옥류벽’ 같은 저마다의 이름이 붙여져 그들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과거에 내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마을이 시작되는 물가엔 작은 나룻배가 묶여 있고, 길을 따라 들어가면 이내 사람이 살고 있는 초가집 한 채가 나타났다. 초가집 마당엔 경운기와 함께 소 한 마리가 한가로이 쉬고 있었다. 농사지을 땅이래야 대부분 비탈진 밭뙈기들, 그나마 버려진 밭고랑에는 무성한 잡초와 이름 모를 들꽃들이 한여름을 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영락없이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찾곤 했던 외갓집의 풍경 그대로였다. 지금의 갈론마을은 그때와는 많이 변했다. 마을 여기저기 펜션이 들어서고, 다리가 놓여 새로 개발된 ‘산막이옛길’이나 ‘충청도양반 길’로 이어지면서 지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그렇다고 추억마저 바뀔 리 없다. 아직도 대부분 담배와 콩, 고추, 참깨 농사로 살아가는 마을 방 한 칸을 얻어 든다면 방학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이야기와 재미로 꾸며진 길 괴산수력발전소 수문이 열리지 않을 때면 사람들은 배수갑문 아래까지 들어가 다슬기를 잡는다. 수월정은 괴산댐 건설로 수몰될 처지에 놓이자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사람들은 이제 고리타분한 옛 추억보다는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에 더 눈길을 준다. ‘올레길’이니 ‘둘레길’이니 새로운 이름을 달고 새로 분장한 것들이 트렌드요, 대세가 된다. 하긴 ‘방학’보다는 ‘베케이션’이 더 그럴싸한 세상이니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어찌 탓하랴. 게다가 그 ‘새로운 것’들은 나름대로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산막이옛길’만 해도 그렇다. 갈론마을에서 물 건너 군자산 자락의 산막이마을에 이르는 길을 ‘산막이옛길’이라 부른다. 조선 후기부터 ‘연하구곡(煙霞九曲)’으로 불리며 명승지로 이름 높았던 계곡길이 괴산댐 건설로 일대가 수몰되면서 계곡 주변의 산 중턱으로 새로운 오솔길을 내고 그 길을 ‘산막이옛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길이는 약 3.9km이며 괴산호 서편으로 이어져 있다. 산막이마을에는 조선 중기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노수신(盧守愼, 1515~1590년)의 고택이 남아 있는데, 그의 후손인 노성도(盧性度, 1819~1893년)가 연하구곡 일대의 풍광과 어우러지는 ‘수월정(水月亭)’이라는 정자를 건립하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수월정은 괴산댐 건설로 수몰될 처지에 놓이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이건한 것이다. 산막이옛길은 2011년 11월에 일반에게 개방되었으며,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 괴산군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이 길은 괴산수력발전소에서 시작하며 차돌바위선 착장을 지나 참나무 연리지, 소나무 출렁다리, 정사목, 호랑이굴, 매바위, 앉은뱅이 약수터, 얼음바람골, 호수전망대, 괴산바위, 괴음정, 마흔고개, 다래숲 동굴, 진달래동산, 물레방아, 산딸기길을 지나 산막이선착장에서 이른다. 괴산호에 바짝 붙어 맑은 물빛을 내려다보며 걷는 길로, 차돌바위 선착장부터 산막이마을을 지나 복원된 노수신 유배지까지는 느긋하게 걸으면 1시간 30분쯤 걸린다. 산비탈길이라고는 하지만 잘 깔린 나무 덱으로 이어져 노약자들이 걷기에도 그리 어렵지 않다. 가는 내내 지명에 얽힌 이야기와 출렁다리, 고공전망대 등으로 꾸며져 있어 지루할 틈도 없다. 그래도 힘들다면 돌아오는 길은 산막이선착장에서 10분 남짓 걸리는 유람선을 택할 수도 있다. 연하협구름다리는 산막이옛길과 충청도양반길을 이어준다. 산막이옛길 끝머리인 수월정에서 한적한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괴산호 물길 건너 또 하나의 걷는 길이 시작된다. 바로 ‘충청도양반길’이다. 옛날 양반들이 과거 보러 가던 그 길을 따라 계곡과 강변을 걷는다. 연하협구름다리를 건너면 다시 갈론마을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갈은구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길은 이내 속리산국립공원지구로 이어진다. 이쯤 잠시 쉬었다 가리라. 추억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추억’이라도 추억하리라. 글·사진 유성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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