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심리

나의 말이 들려요?

대화에는 적어도 ‘나와 너’가 존재하는 2인 이상이 참여합니다. 효과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대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나’에 대한 앎이 중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원했으며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했는지 최대한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상대방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 하나,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나의 ‘생각’에 대해 단정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꼭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잘하려면 먼저 자기에 대한 앎이 중요 많은 분들이 가까운 관계에서 대화의 어려움을 겪어 상담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대화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라고 묻습니다. 대화를 잘하려면 먼저 대화의 주체인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 자기의 말이 상대방에게 잘 들릴 수 있도록 말해야 합니다. Sherod Miller와 PhyllisMiller(1997)가 쓴 책 대화의 기술(Core Communication)〉에 나오는 ‘자각의 수레바퀴(Awareness Wheel)’는 중요한, 혹은 갈등이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대화를 할 때 도움을 줍니다. 대화의 기술 1 자기에 대해 말하기 첫 번째, 자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주어로 1인칭인 ‘나’를 사용하여 자기가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했는지를 말합니다. 대화의 기술 2 관찰한 감각정보를 말하기 두 번째, 자신이 관찰한 감각정보(Sensory Data)를 기술합니다. 자신이 오감(五感)을 통해서 직접 관찰한 정보를 기술하는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를 기술합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이번 주 내내 집에 늦게 들어왔잖아요!”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이 이번 주에 월요일,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 3일을 저녁 10시 넘어서 귀가하는 것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화의 기술 3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세 번째, 자신의 사고(Thoughts)를 기술합니다. 자신이 관찰한 감각정보를 가지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혹은 어떤 해석을 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생각 혹은 해석은 자신이 자라온 가족, 문화, 연령, 교육, 가치관, 기대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행동, 즉 자신이 관찰한 감각정보에 대해 각자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시간 코를 푸는 행위’가 한국 사람에게는 매우 무례한 행동으로 해석되지만, 미국에서는 무례하다고 해석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자각의 수레바퀴의 세 번째 단계인 ‘사고(Thoughts)’에 있어서 개방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 혹은 해석이 틀릴 수 있음에 대해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항상 1%라도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 혹은 해석이 맞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고에서 개방성을 기르는 데는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까 지난주 내내 집에 늦게 들어온 거잖아요!”라고 단정해서 말하는 대신 “당신이 지난주 월, 수, 목 3일을 저녁 10시 이후 귀가하는 것을 보고 저는 당신이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화의 기술 4 자신의 감정을 말하기 네 번째, 자신의 감정을 기술합니다. 자신이 관찰한 감각정보를 가지고 생각을 하고, 그 생각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지난주 집에 늦게 들어온 거잖아요!”라고 단정해 말하면서 화를 내는 대신, “당신이 지난주 월, 수, 목 3일을 저녁 10시 이후 귀가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당신이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화가 났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감정을 억압하는 사람은 감정을 알아차리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말로 표현하는 데 많은 훈련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대화의 기술 5 자신의 원함을 말하기 다섯 번째, 자신의 원함을 기술합니다. 자신의 감각정보, 사고, 느낌을 기술한 후 무엇을 원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혹은 그 외 그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원했는지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속상해 하는 거 안 보여요?” 혹은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요.?”라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의 속상한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어요.” 혹은 “내가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당신과 아이들이 알아주기를 바다섯 번째, 자신의 원함을 기술합니다. 자신의 감각정보, 사고, 느낌을 기술한 후 무엇을 원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혹은 그 외 그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원했는지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속상해 하는 거 안 보여요?” 혹은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요.?”라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의 속상한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어요.” 혹은 “내가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당신과 아이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원함을 드러내놓고 대화를 하면 상대방은 방어를 풀고 열린 마음으로 듣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의 원함을 명확히 알기에 나의 원함에 대해 상대방과의 협상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대화의 기술 6 자신의 행동을 말하기 여섯 번째, 자신이 취한 행동을 기술합니다. 자신의 원함을 위해 자신이 무슨 행동을 취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주기를 바라서 오늘 아침 당신이 출근할 때 모른 척했어요.”, “내가 얼마나 가족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지 알아주기를 바라서 어제 화를 내고 집을 나갔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점은 상대방에게는 나의 사고, 느낌, 원함 이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드러난 나의 행동만이 상대방에게는 감각정보로 관찰된다는 점입니다. 대화의 주체인 내가 명확히 말해주지 않는 한 상대방은 내가 왜 화를 냈는지 혹은 왜 집을 나갔는지 혹은 왜 모른 척했는지를 모릅니다. 다만 화를 내고 집을 나가고 모른 척한 나의 행동만 상대방에게 감각정보로 관찰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화(Myths) 중 하나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면 내가 말을 안 해도 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해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글 한영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여행

푸른 밤의 여로

강진에서 마량까지 둥글다는 건 슬픈 거야. 슬퍼서 둥글어지기도 하지만 저 보름달을 한번 품어보아라. 품고서 가을 한가운데 서 봐라.// 푸른 밤을 푸르게 가야 한다는 건 또 얼마나 슬픈 거고 내가 나를 아름답게 잠재워야 하는 모습이냐. 그동안 난 이런 밤의 옥수수 잎도, 옥수수 잎에 붙어 우는 한 마리의 풀벌레도 되지 못했구나. 여기에서 나는 어머니를 매단 저 둥근 사상과 함께 강진의 밤을 걷는다, 강진을 떠나 칠량을 거쳐 코스모스와 만조의 밤안개를 데리고 걷는다. ‘무진기행’은 칠량의 전망대에 맡겨두고 내 부질없는 시(詩)와 담뱃불만 데리고 걷는다. 걷다가 도요지 대구에서 추억의 손을 꺼내 보름달 같은 청자항아릴 하나 빚어 누구의 뜨락에 놓고 난 박처럼 푸른 눈을 욕심껏 떠본다.// 구두가 미리 알고 걸음을 멈추는 곳, 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이야. 이곳에 이르니 그리움이 죽고 달도 반쪽으로 죽는구나. 포구는 역시 슬픈 반달이야. 그러나 정말 둥근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거고 내 고향도 바로 여기 부근이야. -김영남 ‘푸른 밤의 여로-강진에서 마량까지’ 마량 앞바다의 까막섬은 후박나무를 비롯한 상록수림이 우거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물이 빠지면 아낙들이 갯벌에 들어가 온갖 갯것들을 캐어낸다. 강진에서 마량까지, 김영남 시인을 따라가는 길은 조금은 고단하다. 우선 강진까지의 원정(遠征) 길이 그러하고, 어렵사리 강진에 닿아도 이번에는 구강포를 기점으로 강진만의 한쪽 가랑이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시인의 아는 체를 다 받아줘야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여기는 온전히 그의 ‘나와바리’다. 그는 장흥 대덕 출신이지만 그의 생가가 있는 분토리는 강진 마량에 붙어 있고, 그에 이르기 위해서는 영락없이 이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한 술 더 떠 시인은 스스로 수도 없이 타고 오르내렸을 이 길을 ‘푸른 밤의 여로’라고 명명하여 아예 ‘새끼줄’까지 쳐버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강진에서 마량까지를 ‘푸른 밤의 여로’라고 불렀을 때, 도저히 그를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구강포는 그렇다 치더라도 칠량의 옹기가마와 대구의 청자도요지를 지나 마량의 까막섬에 이르기까지, 그 길이 얼마나 푸른지를. 푸르러서 얼마나 슬픈지를. 때는 가을이고 코스모스 하늘대는 해안 길을 따라가다 밤안개 가득한 마량에 이르렀을 때, 마침 달이라도 둥그렇게 떠오른다면 결국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음을. 사실 시인에게 티는 안 냈지만 나는 그와 처음가기 전에도 몇 번이고 이 길을 오르내렸고, 그 후에도 여러 번 홀로 가기도 했다. 모란이 필 때 영랑생가를 들렀다가 가고, 동백이 필 때 다산초당을 들렀다가도 갔다. 마량에서 물 건너 고금으로 약산으로 ‘그 섬에 가고’ 싶을 때도 갔다. 탐진강이나 천관산, 정남진을 찾을 때 일부러 돌아서 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안다. 강진에서 마량까지, 그 길이 얼마나 빛으로 가득한 길임을. 물비늘 찰랑이는 바다 너머로 뭍인지 섬인지 가뭇하고, 개펄마저 얼마나 투명하게 빛나는지. 그 빛저물고 나면 이번에는 푸른 밤으로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는지를. 강진 칠량옹기는 전국적으로 알아줄 만큼 질이 좋았다. 칠량면 봉황리는 바로 그 칠량옹기의 고향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옹기를 구웠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독점’으로 불렸고, 물이 뱃전까지 찰랑거리도록 옹기를 가득 실은 돛배가 유유히 먼 바다로 떠나곤 했다. 어느 때인가. 시인과 마량의 한 허름한 횟집에서 통음(痛飮)으로 밤을 지새우고 어딘지 모를 유숙(留宿)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신세계의 아침’을 만났다. 열린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새소리는 가볍지만 맑고도 밝았다. 숙취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몸은 가뿐했고, 설레듯 유숙의 문을 열고 나섰다.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고, 밤새 달빛 교교하던 포구에는 어디로 가는지 모를 배가 묶여 있었다. 아마도 고금도나 약산도로 가는 배이리라(그때만 해도 마량에서 고금도를 잇는 연륙교가 세워지기 전이었다). 그 배를 타고 어느 섬으로인가 가고도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내디디면 땅은 문향(文鄕) 장흥이고, 거기 가을 천관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남 시인 195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경제학과와 같은 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정동진역’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푸른 밤의 여로〉, 〈가을 파로호〉가 있으며, 소설가 이청준, 화가 김선두와 함께 고향 장흥을 소재로 한 시·산문·그림 모음집 〈옥색 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를 펴내기도 했다. 윤동주문학상, 중앙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골목이 시작되고, 골목 옆구리/ 파도 출렁대는 곳에 환한 창이 있다./ 그 창에선 초저녁부터 김칫국 냄새가 번지고/ 가끔 웃음소리도 들리곤 한다. 그런데 빠져나온/ 웃음소리 하나가 창을 부풀게 한다./ 자꾸만 부푸는 게 커다란 분홍 풍선이다./ 쪼그리고 앉아 그 풍선 잡고 있으니 내가 질질 끌려 내려간다./ 끌려가 감나무에 걸려 대롱대다/ 바다에 빠져 죽을 것 같아 안간힘으로 버티어본다./ (……) 난 그 풍선을 잡고 먼 나라로 가고 싶다./ 항구란 배만 타는 곳이 아니라 그런 풍선을 잡고/ 더 따뜻하고 아늑한 나라로 출발하는 곳임을,/ 풍선에 바람이 빠져버리면/ 예서부터 흔들리는 귀환이 시작되는 곳임을/ 배운다, 마량항 부둣가에 고동처럼 붙어서. -김영남 ‘마량항 분홍 풍선’ 글·사진 유성문 여행작가

인터뷰

“내 삶의 전성기는 지금, 이 순간”

데뷔 48년 차 가수는 ‘노래’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였다. 10대부터 마이크를 잡은 그녀에게 노래는 인생, 그 자체였다. 국민가수 김연자 이야기다. 서울 논현동에서 만난 김연자는 그 어느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트로트와 EDM을 접목한 히트곡 ‘아모르 파티’가 국내에서 역주행한 지 5년, 지난해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은 데 이어 전남 영광에 자신의 가수 생활을 총 망라한 김연자 기념관까지 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행복한 해였어요.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감사한데, 대외적으로도 좋은 일들이 생겨서 가수 인생에서 굉장히 보람된 순간이 많았죠.” ‘여자로서는 0점, 가수로서는 100점’ 가수는 노래를 따라간다고 했던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아모르 파티'처럼 김연자는 가수로서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여자로서는 0점이지만, 가수로서는 100점’이라고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동안 매 순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노래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유튜브에 있는 예전 영상을 봐도 창피하지 않아요. ‘아모르 파티’는 제 인생 찬가, 인생 응원가를 부르고 싶어서 만든 곡이에요. 인생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제 인생 모토가 가사에 담겨 있죠.” 1974년에 국내에서 데뷔한 김연자는 ‘진정인가요’, ‘수은등’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고 1981년 발표한 ‘노래의 꽃다발’이라는 트로트 메들리 앨범은 무려 36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88서울올림픽에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러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발돋움했다. 이후 그는 1980년대 일본 전역을 누비며 공연을 펼쳤고 ‘엔카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일본에서도 노래만큼은 암팡지게 불렀죠” “일본에서 김연자라는 본명으로 활동을 했는데, 저는 일본에서는 외국인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항상 일본 사람이 걸을 때 나는 뛰어야 된다는 자세로 가수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무대에서만큼은 지면 안 된다는 승부욕이 생겼고 노래만큼은 암팡지게 불렀죠.” 전성기 때 일본에서 10년간 NHK홀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하며 ‘연습벌레’로 유명했던 그녀의 버릇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공연을 앞두고는 집에 틀어박혀 몇 시간씩 노래 연습을 하고 1주일 전부터 1일 1식을 하며 컨디션을 조절한다. “공연 당일은 공복 유지...무대 의상 멋지게 소화해야죠 “아무래도 젊을 때와 목소리가 다를 수 있어서 극복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47년 가수 생활을 하다 보니까 제 몸이 먼저 컨디션을 알려줘요. 노래 연습을 해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를 몸이 먼저 아는 거죠.” 덕분에 ‘블루투스 창법’으로 유명한 그녀의 폭발적인 성량은 60대인 지금도 여전하다. 그녀가 47년째 지키는 철칙 하나. 공연 당일에는 물과 커피 외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공복을 유지한다. 김연자의 트레이드마크인 화려한 무대 의상을 소화하기 위해서다. “제가 무대 위에서 가만히 서 있는게 아니라 360도를 돌면서 노래를 하는 스타일이잖아요. 아무래도 배가 나오면 자신있게 턴을 못하게 되니까 무대 위에서 내가 자신 있게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싶어서 다이어트를 하죠.” 김연자는 “가끔 안 맞는 드레스도 있는데, 고쳐서 입기도 한다. 추억이 깃든 옷이라서 버리지 못하겠더라”며 웃었다. 원조 한류스타 김연자는 일본은 물론 프랑스 파리에서는 한국 가수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여는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다. 남미와 북한도 그녀의 무대였다. 그는 최근 전 세계에 K-POP 열풍이 부는이유를 한국인의 DNA에서 찾았다. “한국은 ‘아시아의 스페인’...떼창에 중독” “세계 어디를 다녀봐도 우리나라 사람처럼 정열적인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감히 ‘아시아의 스페인’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한국 사람들은 흥이 넘치면서도 예의를 갖추잖아요. 일본은 가수들이 무대에서 정적으로 서서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최소 5배는 더 움직이는 것 같아요. 객석에서 신나게 만들어주니까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녀가 라이브를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연자의 콘서트장은 거대한 노래방을 방불케 한다. 김연자는 “‘아모르파티’ 이후에는 젊은 관객들의 떼창이 부쩍 늘었다. 지금은 떼창에 중독돼 그 친구들이 없으면 안 될 정도”라고 말했다. 김연자는 누구보다 특별한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한결같이 자신의 곁을 지켜준 소속사 홍상기 대표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지난해 가을에 결혼식을 하려다 김연자 기념관이 개관하는대로 식을 올리기로 했다. 홍 대표는 지난 2009년 일본 활동을 마친 김연자의 국내 가요계 복귀를 곁에서 살뜰히 챙겼다. “처음에는 제가 다시 한국에 오면 예전의 인기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든게 바뀌었더라고요.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이 사람(홍 대표)이 손을 내밀었어요. 자기한테 한번 맡겨보라고요.” ‘자기야’를 부른 트로트 가수 박주희를 발탁해 대형 가수로 성장시킨 홍대표는 이후 김연자의 국내 활동에 매달렸다. 공식 스케줄은 물론 노래 선곡부터 의상까지 꼼꼼히 챙겼다. 김연자의 의상이 드레스에서 바지 정장으로 바뀐 것도 홍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소속사 대표와 행복한 인생 2막 준비 “저는 10대 때부터 노래만 했기 때문에 ‘길치’에다 사회를 잘 모르는데, (홍 대표가) 노래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해주니까 그 점이 가장 좋아요. 사위와 아들까지 매니저로 함께하니까 마음이 더편하죠.”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홍 대표도 “아무리 작은 방송 무대라도 ‘고시 공부’하듯이 연습하는 김연자를 보면 안쓰러울 때도 있다”면서 “가수로서 큰 성공을 거뒀고 이제 가족으로서 서로 돕고 이해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외에 큰 욕심은 없다”고 말했다. 한편 은행에 직접 방문하는 것을 선호하는 김연자는 “재테크는 잘 몰라도 3년 은행 적금에 묻어두는 것은 잘 한다”면서 웃는다. 돈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건강이다. “오랫동안 가수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이 ‘어차피 해결될 일은 해결되니 너무깊게 걱정하지 말자’예요. 저는 엄청나게 화를 내더라도 풀리는 것도 빨라요. 고민을 하더라도 이왕이면 얕은 데서 헤엄치다 나오는 스타일이죠.” 트로트 열풍이 반가운 한국 ‘트로트의 대모’ 트로트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트로트의 대모’ 김연자는 국내 가요계에 다시 돌아온 트로트의 붐이 너무나 반갑게 느껴진다고 했다. “트로트는 우리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매력적인 장르인데, ‘뽕짝이라면서 무시당하는 게 좀 속상했어요. 그런데 요즘 트로트에 대한 인식이 격상되니까 기분이 좋아요.” 지난해 그녀는 자신의 고향 광주를 알리는 노래 '무조건 광주로'를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용섭 광주시장과 함께 2년 가까이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이 곡에 애정을 쏟았다. “내 고향에 대한 노래가 하나도 없었는데, 이번에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해서 참 좋아요. 이제 비로소 제가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살면서 애향심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평범한 대학생처럼 공부도 하고, MT도 가보고 싶다”는김연자. 그녀는 새해에도 한국과 일본에서 새 앨범을 내고 활발한 활동을 예고했다. 그녀의 새해 소망은 코로나가 사라져원 없이 라이브 무대에서 서는 것이다. ‘현역 가수’ 김연자의 전성기는 바로 ‘지금’이다. 글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erin@seoul.co.kr) 사진 상연기획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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