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 이방의 거리 – 인천 차이나타운
시(市)를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려졌다. 석탄을 싣고 온 화차(貨車)는 자칫 바다에 빠뜨릴 듯한 머리를 위태롭게 사리며 깜짝 놀라 멎고, 그 서슬에 밑구멍으로 주르르 석탄가루를 흘려보냈다
-오정희 서두
‘금’과 ‘적’ 속에 묻혀버린 ‘애환’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대문 역할을 하는 네 개의 패루가 있다. 남문인 '중화가' 패루는 차이나타운의 정문 격이다.
오정희의 소설 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래서 중국인 거리를 찾아가는 길은 가급적 철로를 이용하는 것이 제격이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인천역에서 ‘석탄가루’마냥 부려지면 곧바로 이방(異邦)의 거리와 마주한다. ‘중화가(中華街)’라 적힌 높다란 패루(牌樓)를 지나면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인물들을 만난다. ‘서성(書聖) 왕희지 상’과 ‘성인(聖人) 공자 상’, 거리의 한쪽 벽면을 메운 ‘삼국지’의 인물들, 게다가 과장된 용마루에 자색과 금색으로 가득한 집들, 치파오와 홍등, 재스민 향보다 더 진한 중국음식 냄새, 여기는 이른바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큰 덩치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일종의 적의로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언덕을 넘어 선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언덕은 섬처럼 멀리 외따로 있었으며, 갑각류의 동물처럼 입을 다문 집들은 초라하게, 그러나 대개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역사와 남겨지지 않은 기록의 추측으로, 상상의 여백으로 다소 비장하게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작가가 소설 속에 그린 풍경은 전후(戰後) 인천이라는 작가의 유년시절 풍경이지만, 그 풍경은 우리의 유년시절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지금의 이곳 풍경 역시 그 휘황한 칠만 벗겨내면 금방이라도 본색으로 돌아갈 것만 같기도 하다. 골목길을 몰려다니는 새카만 아이들과 부두에 버려진 고양이, 서모와 계모, 장궤와 양공주, 탄가루와 해인초 냄새, 공설운동장의 정치구호와 성당의 종소리…, 그리고 나머지는 상상의 여백인 것조차.
'짜장면의 원조'로 알려진 공화춘은 '짜장면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초로 자장면을 만들어냈다는 공화춘(共和春)은 이제 ‘짜장면의 추억’을 ‘회칠’한 박물관으로만 남아 있다. 진흥각이니 자금성이니 중화루니, 그 명맥을 이어가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자장면이 ‘꿈의 외식’이었던 시대는 분명 아니다. 이제 호화로운 청루(淸樓)에서는 본격적인 청요리를 마음껏 선보인다. 하다못해 중국식 정통만두를 빚어내는 식당의 입구에는 ‘자장면 없습니다’라는 문구까지 붙어 있다. ‘짜장면’이 아닌 자장면, 그조차 그 잘난 정통에 밀려 ‘형편없는 짜장’ 신세가 되어버린 채 신화와 전설은 이제 가뭇없이 추억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일까. 마치 휘황한 ‘금(金)’과 ‘적(赤)’ 속에 ‘애환(哀歡)’이 파묻혀버린 지금의 차이나타운처럼.
아픔을 딛고 우리는 얼마만큼 성장해 있는가
‘황제의 계단’이라 이름 붙여진 선린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관광객들에게 인기 만점의 포토존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4년 4월, 이 지역이 청국의 치외법권(治外法權) 지대로 지정되자 이 땅에 있던 화교들이 몰려들면서 생성되었다. 북성동, 선린동 일대 5,000 평의 부지에 청국의 영사와 학교가 설치되고, 중국의 산동반도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배가 운항하면서 화교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식료와 잡화, 소금, 곡물을 팔아 사금(砂金) 등을 사들여 중국으로 보내면서 서서히 상권을 장악,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청관의 상권이 마비되자 많은 화교들이 대만, 미국, 동남아시아 등지로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요릿집과 잡화상으로 연명하거나 일부는 부두노동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대우로 화교사회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1949년 중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외 이동이 금지되자 화교사회는 더욱 쇠퇴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공원의 꼭대기에는 전설로 길이 남을 것이라는 노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선창에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의 깃발이 색종이처럼 조그맣게 팔랑이고 있는 사이, 기중기는 쉬지 않고 화물을 물어 올렸다. 선창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섬처럼, 늙은 잉어처럼 조용히 떠있는 것은 외국 화물선일 것이다.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한때 이 동상의 철거 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가 맞붙었다.
전쟁이 끝나고, 차이나타운이 있는 언덕바지 공원에는 또 다른 이방의 동상이 세워졌다. ‘전쟁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은 원래 ‘만국공원(萬國公園)’이었다. 따로 조계(租界)를 차지하고 있던 청국과 일국을 제외한 서방국가들이 모여 살던 각국 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공원은 철저히 외세에 의해 조성된 외국인을 위한 휴게공간인 셈이었다. 120여 년이 지난 후, 외세도 물러가고 전쟁도 끝났건만 한때 남겨진 동상을 두고 자국민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상의 철거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 간에 벌어진 부질없는 힘겨루기였다.
오정희의 는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다. ‘나’는 전후의 신산(辛酸)한 삶 속에 ‘이방의 거리’로 이주되어 온다. ‘나’는 학교가 파하고 나면 또래들과 제분공장의 밀을 훔쳐 먹거나 화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조개탄을 훔쳐내고, 미용사를 꿈꾸는 치옥이와 함께 거리를 싸다니며 아무 데서나 찍찍 침을 뱉어댄다. 중국인을 보면 ‘아편쟁이’니 ‘뙈놈’이니 욕을 해대기도 한다. ‘나’는 푸줏간에 가서 시비를 하고, 이발소에 가서 이발사에게도 되바라지게 악다구니를 해댄다. 그러는 사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중국인의 시선을 느낀다.
나는 다시 손안의 물건들을 나무 밑에 묻고 흙을 덮었다. 손의 흙을 털고 나무 밑을 꼭꼭 밟아 다진 뒤 일정한 보폭(步幅)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며 장군의 동상을 향해 걸었다. 예순번을 세자 동상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두 계절전 예순다섯 걸음의 거리였다. 앞으로 다시 두 계절이 지나면 쉰 걸음으로도 닿을 수가 있을까. 다시 일년이 지나면, 그리고 십년이 지나면 단 한걸음으로 날으듯 닿을수가 있을까. -오정희 말미
소녀의 되바라진 행위나 이유 없는 매슥거림, 까닭 모를 아릿함이 사실은 모두 성장통(成長痛)이었다. 아이는 이방의 거리처럼 낯설고 두려운세상 속에서 통증을 겪으며 자라난다. 그 아픔의 깊이만큼 아이는 성장한다. 우리가 지금 차이나타운에서 보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국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그 속내에 깊이를 이루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다. 이방에서 이방들이 이루어온 삶의 궤적이나, 아직까지도 어엿이 이어지고 있는 삶의 풍정들은 우리에게 성장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아픔의 시간을 딛고 지금 우리는 얼마만큼 성장해 있는가.
글·사진 유성문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