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심리

‘나와 너’가 구분되고 시작되는 곳 – 경계선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으면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구분되기에 서로 다른 인격이 존재할 수 있고 비로소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합니다. 마거릿 말러의 유아의 발달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유아는 출생 후 수주 동안은 자기에게 젖을 주고 돌보는 엄마와 자기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초기 유아의 세계에는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거죠. 유아의 발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은 바로 유아가 엄마와 자신을 구분하는 분화(Differen tiation)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유아가 비로소 나 외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구분 : 몸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눈에 보이는 경계선(Boundary)은 몸입니다. 내가 타인과 구별되는 것은 가장 먼저 내 몸이 다른 사람들의 몸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가장 기초적인 경계선입니다. 나의 몸은 나의 것으로 내가 주인이고, 타인의 몸은 그 사람의 것으로 그 사람이 주인입니다. 자기 몸을 자기 몸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은 과거 노예들이었죠. 노예들의 몸은 주인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몸은 나에게 속해 있기에 나의 책임하에 있습니다. 나의 몸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관리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책임은 가장 먼저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적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자기 몸에 대한 주인의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기 허락 없이 자기 몸이 침범을 당하였기에 자기 몸이 자기에게 속한 것임을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노예처럼 자기 몸을 타인이 함부로 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 몸을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고 폭력에 자신을 노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앞에서 그대로 맞고 있는 자녀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하거나 방어하면서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맞고 있는 아내들이 그런 예입니다. 또한 어렸을 적 폭력으로 자기 몸의 경계선을 침범당한 사람은 자기 몸의 경계선을 보호받지 않았기에 타인의 몸도 타인에게 속한 것을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많은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훗날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자기 몸이 자기에게 속하듯이 타인의 몸은 타인에게 속하여서 상대방의 동의 없이 내가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의 구분 : 느낌 나의 몸이 나에게 속한 것처럼 나의 느낌도 나에게 속해 있습니다. 내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화나거나 놀라거나 이것들은 모두 내가 느끼는 것이고 나의 경계선 안에서 일어나 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느낌들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화가 나는 나의 마음을 달래고 풀 책임이 나에게 있고, 슬픈 나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를 얻을 책임이 나에게 있고, 놀란 내 마음을 안정시킬 책임이 나에게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요청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알아차려주고 위로해주고 달래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서 속상하고 서운할지라도 나의 마음을 기분 좋게 유지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구분 : 생각 나의 생각도 나에게 속해 있고 나의 책임하에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럴 자유도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은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에게 속해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강요하는 게 싫은 것처럼 나도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생각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말입니다. 너와 나의 구분 : 꿈과 소망 그리고 바람 나의 꿈과 소망과 바람도 나에게 속한 것이며 그 꿈과 소망과 바람을 이룰 책임도 나에게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의 꿈과 소망과 바람을 좋아하고 이루도록 도와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나의 꿈과 소망과 바람을 이룰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있습니다. 나의 꿈과 소망과 바람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그들을 설득할 수는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꿈과 소망과 바람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그리고 그들의 꿈과 소망과 바람이 나와 다를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 : 책임과 존중 나의 몸과 느낌, 생각, 꿈과 소망과 바람은 나의 것으로 나의 경계선 안에 있으며, 내가 그것들의 주인이고 그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몸과 느낌, 생각, 그들의 꿈과 소망과 바람은 그들의 경계선 안에 속해 있는 것이며, 그들이 주인이고 그들의 책임하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경계선 안에 속한 것들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존중한다는 것은 그들의 경계선 안에 속한 것들이 나와 다를지라도 인정한다는 것이지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해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나의 것이고 나의 책임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글 한영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여행

그 이방의 거리 – 인천 차이나타운

시(市)를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려졌다. 석탄을 싣고 온 화차(貨車)는 자칫 바다에 빠뜨릴 듯한 머리를 위태롭게 사리며 깜짝 놀라 멎고, 그 서슬에 밑구멍으로 주르르 석탄가루를 흘려보냈다 -오정희 서두 ‘금’과 ‘적’ 속에 묻혀버린 ‘애환’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대문 역할을 하는 네 개의 패루가 있다. 남문인 '중화가' 패루는 차이나타운의 정문 격이다. 오정희의 소설 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래서 중국인 거리를 찾아가는 길은 가급적 철로를 이용하는 것이 제격이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인천역에서 ‘석탄가루’마냥 부려지면 곧바로 이방(異邦)의 거리와 마주한다. ‘중화가(中華街)’라 적힌 높다란 패루(牌樓)를 지나면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인물들을 만난다. ‘서성(書聖) 왕희지 상’과 ‘성인(聖人) 공자 상’, 거리의 한쪽 벽면을 메운 ‘삼국지’의 인물들, 게다가 과장된 용마루에 자색과 금색으로 가득한 집들, 치파오와 홍등, 재스민 향보다 더 진한 중국음식 냄새, 여기는 이른바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큰 덩치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일종의 적의로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언덕을 넘어 선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언덕은 섬처럼 멀리 외따로 있었으며, 갑각류의 동물처럼 입을 다문 집들은 초라하게, 그러나 대개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역사와 남겨지지 않은 기록의 추측으로, 상상의 여백으로 다소 비장하게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작가가 소설 속에 그린 풍경은 전후(戰後) 인천이라는 작가의 유년시절 풍경이지만, 그 풍경은 우리의 유년시절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지금의 이곳 풍경 역시 그 휘황한 칠만 벗겨내면 금방이라도 본색으로 돌아갈 것만 같기도 하다. 골목길을 몰려다니는 새카만 아이들과 부두에 버려진 고양이, 서모와 계모, 장궤와 양공주, 탄가루와 해인초 냄새, 공설운동장의 정치구호와 성당의 종소리…, 그리고 나머지는 상상의 여백인 것조차. '짜장면의 원조'로 알려진 공화춘은 '짜장면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초로 자장면을 만들어냈다는 공화춘(共和春)은 이제 ‘짜장면의 추억’을 ‘회칠’한 박물관으로만 남아 있다. 진흥각이니 자금성이니 중화루니, 그 명맥을 이어가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자장면이 ‘꿈의 외식’이었던 시대는 분명 아니다. 이제 호화로운 청루(淸樓)에서는 본격적인 청요리를 마음껏 선보인다. 하다못해 중국식 정통만두를 빚어내는 식당의 입구에는 ‘자장면 없습니다’라는 문구까지 붙어 있다. ‘짜장면’이 아닌 자장면, 그조차 그 잘난 정통에 밀려 ‘형편없는 짜장’ 신세가 되어버린 채 신화와 전설은 이제 가뭇없이 추억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일까. 마치 휘황한 ‘금(金)’과 ‘적(赤)’ 속에 ‘애환(哀歡)’이 파묻혀버린 지금의 차이나타운처럼. 아픔을 딛고 우리는 얼마만큼 성장해 있는가 ‘황제의 계단’이라 이름 붙여진 선린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관광객들에게 인기 만점의 포토존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4년 4월, 이 지역이 청국의 치외법권(治外法權) 지대로 지정되자 이 땅에 있던 화교들이 몰려들면서 생성되었다. 북성동, 선린동 일대 5,000 평의 부지에 청국의 영사와 학교가 설치되고, 중국의 산동반도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배가 운항하면서 화교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식료와 잡화, 소금, 곡물을 팔아 사금(砂金) 등을 사들여 중국으로 보내면서 서서히 상권을 장악,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청관의 상권이 마비되자 많은 화교들이 대만, 미국, 동남아시아 등지로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요릿집과 잡화상으로 연명하거나 일부는 부두노동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대우로 화교사회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1949년 중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외 이동이 금지되자 화교사회는 더욱 쇠퇴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공원의 꼭대기에는 전설로 길이 남을 것이라는 노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선창에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의 깃발이 색종이처럼 조그맣게 팔랑이고 있는 사이, 기중기는 쉬지 않고 화물을 물어 올렸다. 선창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섬처럼, 늙은 잉어처럼 조용히 떠있는 것은 외국 화물선일 것이다.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한때 이 동상의 철거 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가 맞붙었다. 전쟁이 끝나고, 차이나타운이 있는 언덕바지 공원에는 또 다른 이방의 동상이 세워졌다. ‘전쟁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은 원래 ‘만국공원(萬國公園)’이었다. 따로 조계(租界)를 차지하고 있던 청국과 일국을 제외한 서방국가들이 모여 살던 각국 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공원은 철저히 외세에 의해 조성된 외국인을 위한 휴게공간인 셈이었다. 120여 년이 지난 후, 외세도 물러가고 전쟁도 끝났건만 한때 남겨진 동상을 두고 자국민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상의 철거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 간에 벌어진 부질없는 힘겨루기였다. 오정희의 는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다. ‘나’는 전후의 신산(辛酸)한 삶 속에 ‘이방의 거리’로 이주되어 온다. ‘나’는 학교가 파하고 나면 또래들과 제분공장의 밀을 훔쳐 먹거나 화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조개탄을 훔쳐내고, 미용사를 꿈꾸는 치옥이와 함께 거리를 싸다니며 아무 데서나 찍찍 침을 뱉어댄다. 중국인을 보면 ‘아편쟁이’니 ‘뙈놈’이니 욕을 해대기도 한다. ‘나’는 푸줏간에 가서 시비를 하고, 이발소에 가서 이발사에게도 되바라지게 악다구니를 해댄다. 그러는 사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중국인의 시선을 느낀다. 나는 다시 손안의 물건들을 나무 밑에 묻고 흙을 덮었다. 손의 흙을 털고 나무 밑을 꼭꼭 밟아 다진 뒤 일정한 보폭(步幅)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며 장군의 동상을 향해 걸었다. 예순번을 세자 동상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두 계절전 예순다섯 걸음의 거리였다. 앞으로 다시 두 계절이 지나면 쉰 걸음으로도 닿을 수가 있을까. 다시 일년이 지나면, 그리고 십년이 지나면 단 한걸음으로 날으듯 닿을수가 있을까. -오정희 말미 소녀의 되바라진 행위나 이유 없는 매슥거림, 까닭 모를 아릿함이 사실은 모두 성장통(成長痛)이었다. 아이는 이방의 거리처럼 낯설고 두려운세상 속에서 통증을 겪으며 자라난다. 그 아픔의 깊이만큼 아이는 성장한다. 우리가 지금 차이나타운에서 보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국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그 속내에 깊이를 이루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다. 이방에서 이방들이 이루어온 삶의 궤적이나, 아직까지도 어엿이 이어지고 있는 삶의 풍정들은 우리에게 성장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아픔의 시간을 딛고 지금 우리는 얼마만큼 성장해 있는가. 글·사진 유성문 여행작가

인터뷰

국민배우 윤다훈-“긍정적 사고와 폭넓은 인간관계로 하루하루 나만의 행복을 찾아요”

지난 1월 배우 윤다훈은 첫째 딸 남경민씨의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코로나19 사태로 무려 세번이나 미뤄진 끝에 열린 결혼식. 혹시나 아이들이 지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는 그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사히 결혼식을 올린 아이들이 한없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연기자의 길 걷는 딸 내외와 연극 출연하고파” 딸 경민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배우의 길을 걷고 있고, 사위 윤진식씨 역시 뮤지컬 배우로 활동 중이다. 윤다훈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품과 연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배우 가족’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평소 괜찮은 영화가 있으면 서로 추천도 해주고, 작품을 보면서 구성이나 연기에 관한 이아기를 자주 나눠요. 배우의 각도에서 보게 되니까 서로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죠. 나중에 가족이 다같이 연극 한 편에 출연하는 것이 꿈입니다.” 현재 KBS 2TV 일일 드라마 〈사랑의 꽈배기〉에 출연 “연기자의 길 걷는 딸 내외와 연극 출연하고파”중인 그는 황신혜, 심혜진 등 왕년의 톱스타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미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러차례 함께 출연했던 막역한 사이지만, 두 여배우는 연기 경력 39년차 베테랑 배우 윤다훈을 긴장시켰다. 그 이유가 뭘까. 연기 경력 39년차 베테랑 윤다훈이 긴장한 이유는 “극중에서 두 여배우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역할이니까 제게 멋지게 나와달라고 주문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체중도 4kg 감량하고 외적인 면으로도 노력을 많이 했죠. 두 여배우가 워낙 자기 관리에 철저한 배우들이잖아요. 배우들이 나이 들어도 이름값을 하려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의 건강 관리 비결은 걷기다. 현재 남양주 덕소에서 살고 있는 윤다훈은 매일 대본을 들고 팔당대로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2~3만보씩 강변을 보면서 걷다보면 대본도 절로 외워지고 건강은 덤이다. 촬영이 있는 날에도 새벽 5시에 나가서 걷기 운동을 빼놓지 않는다. “촬영할 때 외부 약속을 거의 잡지 않고 작품에만 몰두해요. 지인들과의 안부도 전화로 대신하고 대본 보고 캐릭터를 연구하는 데 시간을 쏟죠. 어느덧 저도 현장에서 ‘선생님’ 소리를 듣게 되다 보니 배우들보다 스태프들에게 더 존경받는 배우가 되는 것이 제 신조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완벽하게 대사 숙지를 해서 현장에서 NG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면서 “요즘 후배 배우들도 굉장히 똑똑해서 존경받는 선배가 되려면 완벽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이들고파” 스무살에 데뷔한 그는 ‘드라마계 대모’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과 그에게 유쾌한 이미지를 선물해 준 시트콤 〈세 친구〉를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았다. 지난 39년간 한 해도 쉬지 않고 다양한 역할에 출연해 온 윤다훈은 “배우로서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순리를 따르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는 주인공의 부모 역할로 받쳐주는 역할을 많이 맡게 되는데,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손에 쥐고 있는 걸 놓아야지 다른 사람이 또 기회를 잡고, 아름다운 대물림이 되니까요. 언젠가 만나게 될 할아버지 역할도 기대돼요.”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 그는 누구보다 활기차게 인생 2막을 열고 있다. 비결은 긍정적인 사고와 폭넓은 인간관계다. 아내와 둘째 딸이 캐나다에 머물고 있는 기러기 아빠 신세지만, “부모님도 걸어서 5분 거리의 아파트 옆 단지에 사시고, 결혼한 딸 내외도 자주 찾아온다”면서 호탕하게 웃는다. 활기찬 인생 2막의 비결은 긍정적인 사고와 인간관계 “모든 문제에 답이 있듯이 모든 고민에도 답은 있어요. 그래서 가급적 빨리 답을 찾으려고 하고, 잊을 수 있는 고민은 그냥 잊으려고 해요. 머리 속에 고민을 오래 두지 않는 것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 비결이죠.” 그는 중식당을 비롯해, 한우집, 꼬치집, 장어집 등 다양한 요식업에 도전해 온 사업가이기도 하다. 현재는 한 주류회사의 고문 겸 부회장을 맡아 촬영이 없는 날에는 강남의 사무실로 매일 출근한다. 샴페인 등 주류 신제품 개발과 영업이 그의 담당이다. “저는 사실 돈보다 사람이 좋아서 식당을 했어요. 음식도 음식이지만,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늘 좋았거든요.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걸 보고 이번 회사에서도 저를 스카우트하셨다고 하더군요.”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윤다훈은 연예계에서도 소문난 마당발로 꼽힌다. 가수, 배우, 운동선수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인맥의 폭도 다양하다. 야구선수 박찬호부터 농구선수 우지원, 가수 아이유, 배우 조정석 등 나이차도 천차만별이다. 주기적으로 함께 즐기는 모임도 골프, 등산, 캠핑 등 다수다. 박찬호에서 아이유까지... 나이·장르 불문 ‘마당발’ “나이를 떠나서 부담감을 주지 않고,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예를 들어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2013)을 통해 인연을 맺은 아이유처럼 작품에서 인연을 맺은 후배들과 꾸준히 연락하면서 음악이나 연기이야기를 편하게 나누는 편입니다.” 후배들이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도 보고 싶다는 연락을 해올 때 가장 고맙다는 윤다훈. 그는 “몇년 만에 지인이 상을 당했다고 연락이 오면, 친소를 따지지 않고 그길로 곧장 빈소로 달려간다”면서 “같이 슬픔 나누고 위로하다 보면 소원했던 인맥도 다시 끈끈해진다”며 웃는다. 그의 노후 재무 설계는 저축과 연금이다. 그는 “실제로 저를 위해 쓰는 돈은 없고, 가족들을 위해 수입의 거의 전부를 저축하거나 연금 상품을 이용한다”면서 “주식 투자도 조금 하는데, 제 인맥 중에 사업하는 친구들을 통해 권유받은 것 중에 효자 종목이 많다”고 귀띔했다. 나이 들었다고 한탄하기보다는 오늘도 ‘긍정 회로’를 돌려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윤다훈. 그는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면서 “그 나이에 어울리는 행복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말했다. ‘어떤 역할을 맡겨도 잘하는 배우’라는 평가를 듣고 싶어서 오늘도 연기자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는 윤다훈. 배우로서나 인간으로서 늘 '그리운 사람'으로 남는 것이 그의 꿈이다. “연기로 대중에게 기억되고 늘 그리워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제게 맡겨진 일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 같아요. 기쁜 일이 있거나 궂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글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erin@seoul.co.kr)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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