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심리

누가 나를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내가 과연 가치가 있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이미 나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이러한 나를 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가이다. 초희는 중산층의 삶을 혐오하여 상류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부자 남자와 결혼할 것이라고 결심을 합니다. 초희는 결혼에서 철저히 사랑을 제외하였고 자신의 미모와 젊음을 무기로 마침내 상처하고 십 대 자녀들을 둔 한 중년의 부자 남자와 결혼을 합니다. 결혼하여 부자가 된 초희는 그러나 여전히 다른 이유로 자신을 혐오하게 되고, 그녀의 결혼 생활은 초희의 외도와 약물중독으로 파탄이 나게 됩니다. 초희는 박완서의 소설 〈휘청거리는 오후〉에 등장하는 주인공 허성 씨의 첫째 딸 입니다.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 초희는 왜 중산층을 벗어나 상류사회로 가고 싶었을까요? 소설 속에서 1976년에 살고 있는 초희는 “남들은 버스를 탈 때 나는 자가용을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부자와 결혼하는 것이다”라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이런 초희의 말을 상담적으로 해석하면 ‘부자가 되면 나는 특별한 존재 혹은 중요한 존재가 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생각인 자존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청렴결백한 선비가 고결한 존재로 여겨졌다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이 많은 사람이 중요하고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그래서 초희는 상류사회에 진입하여 특별하고 중요한 여자가 되려고 부자와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나 초희는 결혼 전에는 상류층에 비해 가난한 중산층에 속한 자신을 혐오했다면, 결혼 후에는 부에 사랑과 젊음을 팔아넘긴 자신을 혐오하게 됩니다. 초희의 자존감은 부자가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 많은 사람들은 자신 외부의 것들이 자기의 존재를 규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규정하는 것이 타인의 시선, 평가 혹은 자기의 소유물입니다. 초희가 부자가 되어 남들이 버스를 탈 때 자가용을 타면 사람들이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볼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다면, 자기의 노력을 인정해주는 아내와 자식이 있다면, 역경을 이기고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을 하면, 공부를 잘하여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자신이 중요하고 특별하며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것들은 모래 위에 세운 집 같아서 비바람이 치면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상담실에는 바람 피운 아버지가 지긋지긋해서 바람 피우지 않을 것 같은 남자를 고르고 골라 결혼했더니 남편이 바람을 피워 분노 속에 절규하는 아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서러움을 많이 당해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부잣집에 시집갔더니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가난하다고 자기를 업신여기는 시댁으로 인해 절망한 아내, 무능력한 아버지가 싫어서 앞만 보고 돈을 벌어 성공했는데 아내와 자녀들이 자기를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따돌려서 실의에 빠진 아버지들이 오십니다. 이는 비단 상담실에 찾아온 분들뿐만 아니라 나와 우리 주변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이 존재를 추구하지 않고 소유를 추구하기 때문에 무기력하고 절망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을 소유자로 소외시키는 인간은 소유물일 뿐 인간 인격으로서 자신이 되기를 중단하였다고 말합니다. 나를 소중하고 특별하게 대해줄 책임 나를 소중하게 대하고 여겨줄 사람은 가장 먼저 나여야 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를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로 대해줄 책임이 더 이상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외부에 있는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있습니다. 결혼의 실패가, 배우자의 외도가, 부모님의 가난과 무지가, 부자가 못된 것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 공부를 못한 것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이것이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소중하고 특별하며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괜찮은 존재인 것을 규명받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을 바라보다가 소진되고, 때로는 배신감과 좌절감으로 절망하기도 합니다. 가족치료자인 버지니아 사티어(Virginia Satir)는 사람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타당하게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가지면서 가족의 심리적인 문제가 발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내가 과연 가치가 있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이미 나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이러한 나를 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가라고 강조했습니다. 에리히 프롬도 의식하건 안 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것은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라고 말합니다. 글 한영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여행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할 길 – 김훈의 <남한산성>

허송세월하는 나는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 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쳤다. 먼 성벽이 하늘에 닿아서 선명했고, 성안에 봄빛이 자글거렸다. 나는 만날 놀았다.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서 무참하였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있는 동안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김훈 서문 중에서 죽을 길과 살 길은 포개져 있다 죽을 길과 살 길은 모두 성 밖에 있다. 성 안에는 죽을 길도 없고 살 길도 없다. 예전에 남한산성 길을 가려면 1637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당한 치욕이야 어떠하든 공원입장료 2,000원을 떼이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길을 넘어야 했다. 30분 안에 통과해야만 먼저 낸 입장료를 되돌려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길옆에 나앉은 동문 정도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재였다. 더는 곁눈 팔 겨를조차 없이 반대편 톨게이트에 도달하면 비로소 ‘단순통과자’로 분류되고, 돈을 돌려받았다. 돈은 돌려받았으되, 남한산성에 들어앉은 그 깊은 치욕의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쳐버렸다. 톨게이트도 폐쇄된 지금, 행자는 남한산성을 넘다 과연 ‘치욕의 역사’를 새삼 곱씹어 볼 수 있을 것인가. ‘너희가 살고 싶으면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해서 황제의 명을 받으라. 너희가 죽고 싶거든 성문을 열고 나와 결전을 벌여 황천의 명을 받으라!’ 이것이 남한산성 안으로 들여보낸 청나라 군대의 투항권유서였다. 이 문서는 그 삼엄하고 정연한 현실주의적 어법으로 읽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죽을 길과 살 길은 모두 성문 밖에 있다! 살 길은 황제의 명을 받는 것이고 죽을 길은 황천의 명을 받는 것이다! 성 안에는 죽을 길도 없고 살 길도 없다! 성 안에서 죽을 길과 살 길은 포개져 있어서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정당한 자존의 길이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김훈 중에서 1636년 음력 12월,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눈보라를 몰고 서울로 진격해왔다. 병자호란이었다. 정묘호란을 겪은 지 불과 9년 만이다. 방비를 갖추지 못한 채 척화만을 내세우던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다시 강화도로 파천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이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8km이다. 자연석을 사용, 큰 돌은 아래로 작은 돌은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역시 동서남북 4곳에 장대를 세웠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산성의 축조와 건축물의 설립에는 주로 승군이 동원되었다. 성 안에 9개의 사찰이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성을 따라 돌다보면 곳곳에서 절을 만났으니 성 전체가 마치 부처님의 도량인 듯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조선의 선비정신과 불교의 호국정신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성 안에 만해사상연구소가 들어서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지금 성 안에 남아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된다. 동·남문과 수어장대, 연무관·현절사 등과 장경사 등 몇 개의 절이 남아있다. 남한산성은 2014년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봄이 무르익어 가고 여름이 다가오면 남한산성 일원에는 아카시아 꽃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마치 깊은 치욕을 가리기라도 하듯. 치욕의 현실 위에서 삶의 길은 열린다 가까스로 남한산성을 넘어 간 행자는 자못 마음 을 놓고 퇴촌을 돌아 분원리 쯤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붕어찜 한 접시에 땀을 빼기 십상이다. 그러나 길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앵자봉 아래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다. 조선 말 젊은 유신(儒臣)들은 천진암에 은거하며 서학에 경도되었다. 강 건너 능내마을에 살던 다산 정약용의 형제들을 비롯한 일단의 젊은 지식인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으나 핍박 받았고, 분열되었으며, 마침내 일부는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나눔의 집 위안부 피해 할머니 상징 조각상. 촉촉한 봄비가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버린 할머니의 눈가를 적셔준다. 경기 광주 초월면 지월리의 허난설헌무덤. 고속도로의 소음을 마주한 가파른 언덕바지에서 먼저 떠난 두 아이의 무덤을 그러안고 있다. 그러는 사이 천진암의 승려들은 단지 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참수당 하고 절은 폐사되었다. 그 위에 지금 한국 천주교는 무려 100년에 걸친 대대적인 성역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 있는 원댕이마을의 나눔의 집은 또 어떤가. 나눔의 집은 하나둘 스러져가는 위안부 할머니들로 해서 이제 바라보기조차 안쓰럽다.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그들이건만, 잘난 후손들은 그 상처를 씻어주기는커녕 그 위에 소금을 뿌려대기 일쑤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슬픔을 감싸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모성일 뿐이다. 그래서 지월리의 허난설헌 무덤은 더욱 구슬프다. 조선에서, 여자로, 그것도 한 남자의 지어미로 태어난 것을 통탄했던 그녀의 무덤은 한쪽 어깻죽지로 자신보다 먼저 떠난 두 아이의 무덤을 그러안고 있다. 허난설헌의 무덤이 그러안고 있는 것은 자식들의 무덤만이 아니다. 유택 앞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너머 원댕이마을처럼 현실에서 패퇴한 남자들 뒤에서 치욕으로 스러지는 이 땅 여성들의 깊은 한숨까지도 그렇게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다. 거기서 겨우 위안의 실낱을 붙잡으려는 나는, 남자라서 부끄럽다. 이상향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곳이 어디든 갈 수 없는 길과 나아가야 할 길은 결국 포개져 있다. 치욕의 현실 위에서 삶의 길은 열리는 것이며, 치욕 역시 삶의 일부라고 은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삶이든 역사든 오롯이 온전할 수만은 없는 것이며,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이겨냈을 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고 믿는 것이다. 글 유성문 여행작가

인터뷰

배우 이광기 – 미술로 연 인생 2막, 보람있고 행복해요

배우 이광기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미술 갤러리 대표를 비롯해 미술 경매 등 아트디렉터(전시 기획자)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종영한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정도전 역할로 활약했던 그는 “요즘 제 삶의 90%는 미술 관련 일”이라면서 “부캐릭터였던 미술이 본캐릭터가 된 셈”이라며 웃었다.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미술 사업 매력적 “배우는 계속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아야 하지만, 미술 관련 사업은 제가 주도적으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특히 제가 전시한 기획의 반응이 좋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작가들을 발굴할 때 큰 보람을 느끼죠.” 1985년 데뷔해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하고 사극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20여 년 전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2000년부터 조금씩 여유가 생길 때면 미술 작품을 꾸준히 사 모으면서 내공을 키웠고, 미술품 수집가로서의 시간들이 아트 디렉터로 일하는 데 발판에 됐다”고 말했다. 처음엔 취미로 시작하던 미술 관련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2009년 아들을 신종플루로 잃은 큰 아픔을 겪으면서부터다. 그는 그해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아이티로 봉사를 떠났고 미술 사업을 통한 나눔에 눈을 뜨게 됐다. “우리 아이가 하늘나라로 간 날, TV에 지진이 발생한 아이티의 아이들이 울고 있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때 우리 아이로 슬픔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이의 생명보험금을 월드비전을 통해 아이티에 기부했어요. 그 일을 계기로 아이티에서 봉사활동이 시작됐죠.” 나눔은 떠난 아이가 남겨준 선물 이광기는 아이티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생각에 2010년부터 12년간 꾸준히 자선 경매를 했고 아이티에 3개의 학교를 지어줬다. “어쩌면 미술품 수집가로만 남을 수 있었던 인생이었지만, 봉사를 하면서 경매를 시작했고 공격적으로 좋은 작가들의 작품을 선점하다 보니 전시 기획자가 되었죠. 미술을 통해 재능을 나눌 수 있고, 아픔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에 나눔은 떠난 아이가 저에게 남겨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봉사활동에서 만난 아이티 아이들의 순수한 미소를 카메라에 담던 이광기는 2017년 첫 개인전을 열고 사진작가로도 데뷔했다. “해외 봉사를 다니다 보니 아이들의 슬픈 모습보다 기쁜 모습을 많이 찍어주고 싶더라고요. 아이들이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느꼈지더군요.” 이광기는 2018년 파주출판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스튜디오 끼’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미술 사업에 뛰어들었다. 유튜브를 통해 미술품 경매를 진행하고 될성부른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키우는 것이 그의 일이다. 좋은 그림이요? 자신이 행복해지는 그림이죠 “무명 배우도 누군가 캐스팅을 하지 않으면 빛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무명 작가도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메커니즘을 보수적인 미술 시장에 도입했고, 아트테이너적인 기능을 접목하기 시작한 거죠.” 그는 2년 전부터 유튜브에서 미술 경매쇼를 진행하고 있는데 딱딱한 경매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 형식으로 작가들과 그의 작품을 소개하다 보니 젊은 수집가들의 유입도 상당하다. 요즘 미술 작품에 투자하는 ‘아트테크’의 유행으로 미술 시장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그의 작품 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입소문이 났다. “그림은 주식이나 코인과 달리 내 눈에 바로 보이기 때문에 가치가 곤두박질 치기는 어려워요. 저는 늘 리셀이 되는 작가의 작품을 권하는 편인데, 조금 가격이 떨어질 수 있어도 언젠가는 회복이 되기 때문이죠. 가성비가 좋은 그림을 찾으려면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좋은 큐레이터 등 좋은 길잡이를 만나는 것이 중요해요.” 그는 “저에게 투자가 될 만한 그림을 골라달라는 요청이 많은데, 저는 대신 행복해지는 그림을 골라주겠다고 답한다”면서 “결국 자신이 좋은 갤러리에서 하는 전시를 꾸준히 보고 동호회를 통해 공부도 하고, 그림도 꾸준히 사보면서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방탄소년단 RM을 비롯해 연예계에도 미술 애호가가 상당히 많고 그들이 미술 시장에 끼치는 영향력도 적지 않은 편이다. “저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연예인들이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아서 멀리 가는 것보다는 미술을 바라보고 힐링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림을 통해서 다양한 삶을 경험하고 내가 못 봤던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죠.” 그림과 연기의 공통점..."군더더기 없는 연기 하고 싶어요" 그 역시 미술 작품을 보면서 연기 활동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평면적인 그림을 자신의 느낌대로 해석하다 보면 상상력을 키우게 된 것. “같은 그림도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볼 때마다 기분이 다 달라요. 그림을 보면서 느낀 상상력이 결국 대본을 볼 때도 연결되더라고요. 특히 작가도 처음에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캔버스에 뭔가를 채우려고 하잖아요. 근데 연기 생활 30년이 넘다 보니 이제는 그림도 연기도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더 좋아요.” 그는 “드라마는 팀워크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는 선후배들의 가교 역할을 잘 하고 현장을 재밌게 해주는 배우로 남고 싶다”면서 “좋은 작품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작품에 복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광기가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그림을 배우는 것이다. 그는 “연기자는 체력이나 암기력이 떨어지면 연기를 하기 어렵지만, 화가는 90세가 넘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면서 웃었다. 누구보다 미술로 인생 2막을 빨리 연 그는 앞으로 다양한 미술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저는 미술에 제 인생을 걸었어요. 우선 미술과 관련된 웹드라마나 방송사들과 함께 미술 관련 콘텐츠 영상도 계획하고 있고, 지자체와 미술 사업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무엇보다 파주출판도시를 경기 지역의 아트 허브로 만드는데 제 힘을 보태고 싶어요.” 글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erin@seoul.co.kr) 사진 최지혜 포토그래퍼 / 스튜디오 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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